입국과 선교활동
주문모 신부는 1800년 4월경 서울에서 명동회(明道會)를 만들고, 정순모(鄭順母), 강경복(姜景福) 등 여러 교우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5월 양근·여주 지방의 교난으로 정약종(丁若鍾)이 서울로 이주하자, 그를 명도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경기도의 교난 소식을 듣고는 황사영, 현계온(玄啓溫), 정약종, 정광수 등과 함께 광통교(廣通橋)의 김씨 집에 머물렀다. 10월부터 두 달 동안 홍필주, 정약종, 김종교 등의 집을 전전하였다. 12월 23일 황사영을 만나기도 하였다.
1801년 1월 19일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의 서한 등이 담겨있던 책籠(冊籠)이 발각됨으로써 신유교난(辛酉敎難)이 크게 이러났다. 그것은 정약종의 것으로서 포천 홍교만(洪敎萬)의 집에 맡겨 두엇던 것을 임대인(任大仁)이 아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다가 발각된 것이다. 2월 20일 책롱사건으로 수색 체포령이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홍연이(洪連伊)로부터 듣고는, 남구월(南九月)의 안내로 전동 양제궁으로 피신하였다. 사흘 후 양제궁을 나와 서소문에서 이씨를 만나 가의 행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서울을 빠져 나와 품팔이 마부를 불러 말을 타고 황해도 황주(黃州)로 갔다. 3월 12일 서울로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주신부 관련 외교문제 논의
주문모 신부의 죽음을 둘러싸고 대왕대비 김씨는 네차례에 걸쳐 대신들과 논의하였다. 즉 주문모의 체포이후 3월 16일과 27일에, 황사영의 체포 이후 옥천희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10월 15일, 진주문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10월 27일에 열렸다. 그런데 대왕대비는 주문(奏文)작성을 검토하였지만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중국에 자문도 보내지 않은 채 주문모 신부를 4월 19일(양력 5월 31일) 새남터에서 군문참수형(軍門斬首刑)으로 처형하였다.
조선교회 반응
신유교난은 주문모 신부의 죽음과 서양 선박 영입 방안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대되었으며, 특히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초기교회는 지도급 신자들을 대부분 잃게 되었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적이 드문 산골로 찾아들어 교우촌을 이루기도 하였다. 신자들은 10년이 지나서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자, 교회를 재건하려는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들이 계속해서 1811년과 1826년에 북경 교회를 통하여 교황청에 보낸 서한에서는 빠짐없이 선교사를 보내줄 것과 서양 선박 영입의 경험을 바탕으로 육로보다는 해로를 통하여 입국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양력) 조선교구를 설립하고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를 임명하였다.
맺음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조선교회 신자들의 청원과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응답으로 1793년 말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교회의 유일한 사제로서 사목생활을 하다가, 18014년 신유교난(辛酉敎難)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런데 대왕대비는 대신들과 자수한 주문모 신부의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중국에 알리는 문제, 또 백서사건이 일어난 후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을 담은 주문작성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다. 그것은 그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대왕대비가 주문작성에 적극적인 이유는 첫째, 정치적인 변화를 들 수 있다. 갑작스런 정조의죽음 이후 수렴청정을 하게 된 대왕대비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기에 정권유지에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 때에 중국으로부터 저치 외교적인 압력을 받는다면 정권유지에 위험부담을 갖게 된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둘째, 천주교 정책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대왕대비는 정조대의 천주교 정책인 교화우선 정책을 벗어나, 천주교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파악하고 천주교인을 역율(逆律)로 다스리는 등 강경책을 사용하였다.
이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첫째, 가경제(嘉慶帝) 당시 천주교 정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역대 황제들처럼 서양선교사들은 우대하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박해를 일으키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국인이라 하더라도 신부인 그의 죽음에 대하여 책임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조선과 비슷한 입장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당시 중국정부에서 볼 때 주문모 신부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주문을 통해서 주문모 신부의 죽음을 알면서도 외교적으로 문제를 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구 이 주문모 신부 사건은 조선정부의 대왕대비와 대신들의 걱정과는 달리, 중국정부에서 문제화하지 않음으로써 외교문제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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