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사순절은 참회와 속죄의 정으로 단식과 절제, 자선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단신하고 자선을 베풀라』는 마태오 복음 6장(1 ~ 4, 16 ~ 18)의 말씀은 사순절의 특징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단식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에도 동참 하게 된다. 단식은 배만 고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그릇 된 충동을 제어 하고 아무 것 에도 노예가 되지 않는 절제의 태도이다. 육체적 단식에는 반드시 정신적 단식이 따라야 한다. 성서에 의하면 단식은 중대하고 큰 일을 성취 하기 위해 준비하는 행위로서 기도와 더불어 행하며 하느님께의 의탁과 겸손과 참회의 표현인 동시에 속죄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행위이다.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40일동안이나 기도하며 단식 하였다.
초대 교회에서도 사순절은 주로 단식과 회생으로 자신의 죄를 보복하는 기간으로 간주 되었다. 본래 단식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실천 하던 것을 교회 법규에 도입한 것이다. 4세기 이후에는 단식이 예비 신자들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그 후 단식 규정이 세분화 되고 엄격화 되면서 부터 금육 규정도 첨가 시켜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는 것이다. 단식에 대한 교회법은 하루 세끼니 중에 한 끼니만을 충분히 먹는 것으로 규정 하고있다.
오늘날에는 단식 규정이 완화 되어 단식일이 1년에 이틀 밖에 되지 않는다. 금육도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의 매 금요일에만 지키면 되고 그것도 외식을 하는 경우에는 관면이 되고 있다. 교회에서는 이처럼 단식과 금육 규정을 완화시킨 반면에 자선을 강조 하고 있다.
단식은 속죄와 참회와 경건의 표시가 되지만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위가 될 우려가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매주 두번 씩 단식 했지만(루까18ㆍ12) 예수께서는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보시고 단식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하라고 하셨다. (마태6ㆍ15)
사랑과 선행이 없는 단식은 아무 효과가 없다.
단식은 이웃 사랑안에서 그 참뜻이 밝혀 지는데 이 것은 이사야서에 잘 명시 되어 있다. 『단식 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하고 싸움이나 하며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냐? 이 따위 단식은 집어 치워라.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 주고 멍에를 풀어 주는 것이며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떠돌아 다니며 고생하는 나그네를 집에 맞아 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고 제 골육을 모르는 체 하지 않는 것이다. (이사야58ㆍ4, 6~7) 단식에는 자선과 나눔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육고기 값을 절약한 만큼의 금전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금육일에 먹는 물고기가 이웃집의 불고기나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고행 자체가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야『너희는 서로 괴롭히라』할 것이지 구태여『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웃사랑
자선은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는 행위이다. 자선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요 사심 없는 봉사이다. 자선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함』(사행20ㆍ35)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성서는 불우한 이웃에 대한 자선을 강조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수확의 일부를 들에 남겨 두고(데위19ㆍ9~23ㆍ22)3년 마다 한번 씩 소출의 십분의 일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내 놓았다. 9 신명 14ㆍ28, 토비1ㆍ8) 하느님은 자선을 찬미의 제사로 받아 들이시며(집회35ㆍ2) 축복과 은혜를 베푸시고(잠언19ㆍ17~28ㆍ27) 죄인은 자선으로써 죄사함을 받는다. (다니4ㆍ24, 집회3ㆍ30) 예수께서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선(마태9ㆍ13)이라고 하시면서 자선은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루까12ㆍ33) 이니 남몰래 하고 몰려 받을 생각 없이 하라고 하셨다.(루까6ㆍ35) 또한 자기 재산으로는 물론이고(루까8ㆍ3) 불의한 재물로써도 (루까16ㆍ9) 자선 하라고 하셨다. 자선에는 한계가 없다. 냉수 한 그릇(마태10ㆍ24)에서부터 소유의 전반(루까19ㆍ8)이나 가진 것 모두(루까18ㆍ22)에 이르기 까지 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루 살렘 교회 신자들을 위해 매 주일 구제금을 모았고(사행11ㆍ30, I꼬린16ㆍ1~4, 로마15ㆍ25~27) 사도들이 뽑은 부제들은 가난한 이들과 과부들을 돌보는 일을 전담하였다. (사행6ㆍ1~6)
사도들은 믿음에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형제애를 당부 하였고(야고2ㆍ14~17) 자기 이웃의 궁핍을 보고도 동정 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 이라고 하였다. (I요한3ㆍ17 ~ 18)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강조 하였다. 이 두가지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웃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라. 이웃에는 무관심하다면 참 된 크리스찬이 아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써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혈연이나 종족 등을 공유 하는 것이 타인을 이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으로 부터 사랑하고 돕는 것이 타인을 나의 이웃으로 만드는 것이다. 본래 내 것 이란 없다. 다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기에 자선은 부자냐 가난한 자 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랑이 있다면 자선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많이 가진 이는 많아 나누고 적게 가진 이는 적게 나눌 수 있을 것 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순절 성금은 훌륭한 자선 행위 이다.
우리가 이웃을 참으로 만족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은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 자신이다. 나의 고통을 무릅쓰고 기꺼이 이웃을 도와 주는 것이 곧 내 자신을 내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는「가진바 전부」를 이웃을 위해 내놓으셨고 실제로 당신 생명을 내 놓으 셨다.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을「위한」사람이 되어야 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귀중한 기간을 내주었고 관심을 쏟아 자선을 베풀었다. 우리 주위에도 방문하고 돌보아 주어야 할 불우한 이웃이 있으며 도움의 손길이 아쉬운 사람들이 많다. 자선은 물질적인 도움 만을 뜻하지 않는다. 보수를 요구하지 않고도 해줄 만한 봉사가 얼마 든지 있다. 자선은 크리스찬 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너희는 내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내가 굶주리고 목 말랐을 때에, 나그네 되고 헐 벗었을 때,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돌보아 주고 찾아준 까닭이다』(마태25」34~36)고 하심으로써 이웃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의 척도가 되며 우리 자신의 구원을 결정 짓는 기준이 됨을 알려 주셨다. 만일 우리가 단식이나 금육의 고행을 잘지키면서도 자선이나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행의 사순절 만이 아니라 사랑의 사순절로 만들 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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