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동안 교회의 전통적인 속죄 행위는 기도와 재계와 자선 이므로 기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준비 하기 위해 고요 하고 한적한 광야로 나가 단식하며 기도 하셨다. 사람들과 상종하기 전에 먼저 고요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셨고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기도부터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를 체험 하려고 모든 것을 떠나셨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음식과 모은 편의 가지도 끊으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현존과 만남을 체험 하는 것이 먼저 실현 되어야 물집도 의미가 있기 때문 이었다.
물질과 경제가 정신계를 지배 하려는 오늘날에도 역시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정신과 영혼을 지닌 인간이 완전히 물질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우리 인간의 첫째 가는 의무는 창조주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하느님께로 방향 짓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위로 모아 올린 두 손은 바로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고 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 아니겠는가!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대화 이며 그 분의 현존과 사랑을 체험 하는 방법이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한 시도 살수 없는 우리 인간이 그 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중의 하나가 기도인 것이다.
기도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 하고 높여주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희망을 갖게 해준다.
유다인들은 기도하는 백성 이었다. 그들에겐 「임의 무기인 기도는 힘이 세다」는 오랜 격언까지 있을 정도다. 유다인인 예수님 역시 기도가 생활화 되어 있었다.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나(마르꼬1ㆍ35) 한 밤중에(마르꼬6ㆍ46) 어떤땐 밤새도록 (루까6ㆍ12) 기도하셨다. 제자들에겐 용기를 잃지 말고 끊임 없이 기도하라고 하심으로써 (루까 11ㆍ5~10, 18ㆍ1) 기도가 단순히 신심 행위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셨다. 예수님은 기도를 일정한 장소에서 하시지도 않았다. 한적한 곳이나(루까5ㆍ16) 산에서 (루까6ㆍ12) 혹은 외딴 곳에서(마르1ㆍ35) 기도 하셨고 성전이나 (루까19ㆍ46)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골방에서(마태6ㆍ6) 기도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자세도 일정치가 않았다.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하는가 하면 무릎을 꿇기도 하고 앉거나 서서 기도하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행동의 올바른 지침을 기도를 통해 얻으셨다.
특히 중요한 일은 기도안에서 준비되고 이루어 졌다. 예컨대 세례 받으실 때(루까3ㆍ29) 전교하시기 전에 (마르꼬1ㆍ35) 열두사도를 뽑기 전에 (루까6ㆍ12) 베드로의 신앙 고백 전에 (루까9ㆍ18) 거룩한 변모전과 그동안에 (루까9ㆍ28~29) 기적을 행하실 때 (마르꼬 9ㆍ26) 주의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루까11ㆍ1) 최후의 만찬 때 (루까22ㆍ27) 수난 전 겟세마니 동산에서 (마태26ㆍ36~45)기도 하셨다.
기도는 함구해야 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해야한다.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사람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될것』(마르꼬11ㆍ24) 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굳센 믿음과 신뢰를 지녀야 할 것이다. 기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응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기도 해야 한다. 비록 분심이 들더라도 꾸준히 기도할 때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가장 훌륭한 기도가 이루어 지는 단계에까지 도달 하게 될 것이다. 기도는 아쉽고 필요한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기도는 한낱 하느님을 이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이기적인 기도를 하시지 않았다.
언제나 찬미와 감사로써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주의 기도가 그랬고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가 그랬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순종과 신뢰야 말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흔히 우리가 구하는 것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마치 겟세마니 동산에서 고통과 죽음의 쓴잔을 멀리 해 달라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부활이라는 더 높은 차원에서 들어선 것이다.
기도할 때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친밀감과 효성을 갖고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내 맡겨야 한다. 하느님은 결코 두려우신 분 이거나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압바」(Abba)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천진한 어린이의 아빠께 대한 신뢰에 찬 친밀감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예수께서「압바」라고 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잇는 사랑과 효성의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드러내신 것이다.
하느님을「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런 특전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느님을「압바」,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특전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함으로써 이 영광스런 특전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는 이성적인 머리로만 할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과 감정과 의지로 해야 한다. 기계적이거나 부담스런 의무감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여야 한다. 예수님은 피땀까지 흘리면서 기도 하셨으니 온 인격으로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활동은 육체였고 기도는 영혼이었다. 기도를 통한 예수님의 일상생활은 일생동안 계속 되었다. 우리가 성당에서만 기도하고 성당 밖에 나가서는 기도에 소홀 한다면 기도를 생활에 연결 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겐 기도와 생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생활화, 생활의 기도화가 되도록 특별히 이 사순절 동안 노력 해야 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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