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세계성체대회를 위해 한국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고 있다. 그는 발을 딛는 나라마다 그 땅에 입을 맞추고 축복하며, 되도록 많은 이들을 만나려 노력했다.
104차례, 129개국을 사목 방문한 교황, 공산국가 출신의 첫 교황, 1385명의 시복시성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교황. 파격과 새로움을 보여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작점에는 굳센 신앙과 굳은 믿음이 있다.
카롤 보이티야, 교황이 되다
▲ 유년 시절의 요한 바오로 2세.
10월 21일, 폴란드의 어린 소년이었던 카롤 보이티야가 바티칸 광장에 섰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보고 ‘빠빠(교황)’라고 외치며 성호를 긋는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군중들과 대관식에서의 첫 만남이었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공산국가 폴란드에서 날아온 교황.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교황은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가톨릭대사전은 당시 교황의 이 말을 두고 이탈리아인이 아닌 교황에 대해, 교회가 안고 있는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 전쟁과 핵 위험과 테러리즘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임 교황들과는 다른 행보를 걷는다. 교황관을 쓰지 않고 성 베드로광장에서 소박한 취임식을 연 것이다. 그의 이러한 소박함은 청년기 때 보냈던 다양한 인생경험에서 우러나왔다.
그처럼 다양한 인생을 경험한 이도 드물었다. 크라쿠프의 야겔로니카 대학에서 폴란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그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솔베이 화학공장의 근로자로 일했다.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운반하며 발파작업을 했고, 수질 정화부로 일하기도 했다.
교황이 돼서도 그는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을 찾았다. 그 대상은 신자와 비신자로 나뉘지 않았다. 갈라진 형제들을 만났고, 공산국가의 수장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타종교인들과도 스스럼이 없었다.
▲ 1978년 10월 교황 취임식에서의 요한 바오로 2세. 그는 교황관을 쓰지 않고 소박한 모습으로 취임식에 임했다.
전 세계와의 만남
1979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를 열기 위해 멕시코에 발을 딛자 요한 바오로 2세는 땅에 입맞춤하고 많은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이 모습을 시작으로 그는 발을 딛는 나라마다 그 땅에 입을 맞추고 축복하며 되도록 많은 이들을 만났다.
1984년 우리나라를 찾았을 때도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순교자의 땅’을 외치며 한국 땅에 입을 맞췄으며, 서울과 대구 등 다양한 곳을 방문해 최대한 많은 이들을 만나려고 노력했었다.
멕시코를 방문했던 교황은 1979년 후반 폴란드, 아일랜드, 미국, 터키 등을 잇달아 방문했으며, 초인적인 의지로 해외순방을 계속했다. 이러한 와중에도 그는 스키와 하이킹, 카누 등을 즐기며 강건함을 드러냈으며, 더 많은 이들과 더 많은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 쉼 없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러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여정은 그의 말과 생각, 행동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취임 초기, 몰려든 기자들에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고 분명하게 전했다.
“교황은 바티칸 안에 죄인처럼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초원의 유목민들부터, 수도원의 수사나 수녀들까지 모든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또 모든 가정을 방문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