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5월 22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이 영국과 아르헨티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 중 행한 강론 내용이다.
공경하올 형제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올 자녀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대 둘레에 모여 봉헌하는 이 미사의 중요 목적은 남대서양에서의 분쟁으로 인해 서로 분열되고 불목하고 있는 양국 간의 평화를 기원하는 위해서 입니다. 이 분쟁은 이미 고통스런 결과들을 낳고 있으며 평화적인 해결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앞으로 보다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전망입니다.
성영 작가는 영감을 받은 말씀으로 우리에게『주께서 집을 짓지 않으면 그집짓는 자들의 노력이 헛되다』(성영 126 ~ 1)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론 분쟁이 협상을 통해 공정하게 해결 되길 희생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시 하시는 가운데 하느님의 가장 고귀한 평화의 선물을 내려주시도록 간청 하기 위해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평화는 모든 진정한 발전을 위한 대치될 수 없는 전제 조건입니다.
저는 현재 양국민의 선과 참된 이익에 극히 본질적인 목표를 성취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 요인둘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강한 신앙의 학신으로 재확인합니다. 평화는 의무이며 평화는 가능합니다.
평화는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의 모든 거주자는 어디서 태어났던, 어떤 언어로 자신의 생각과 가정을 표현 하던,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정치적 혹은 종교적인 신념이 어떤 것이던 모든 사람은 하나의 인류가족에 속하기 때문 입니다. 고대의 현자는 이 인류 가족을 「제한이 없는 집단」(치체로「데 아미치씨아」5참조)으로 여겼습니다.
신앙인들이 그들의 모든 이웃안에서『한 조상에게서 세계 온 인류를 드셔서 온 땅위에서 살게 하신』(사도17ㆍ26) 그 분의 모상을 인식한다면 어찌 이를 확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비록 역사의 시초에 발생한 배반행위가 인간 사이에 슬픈 분열로가 피의 투쟁을 초래케하고 그 같은 역사로 점철돼 있다고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변함 없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 영원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곧『당신의 백성이 죄를 짓고 당신으로부터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을 때 당신은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과 함께 하나로 되심과 같이 그들을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을 당신과 재결합 시키셨습니다』(연중 8주일 입당송) 이런 이유로 인해 예수께서는 자신의 수난을 준비하실 때 그 분은 성부께『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께 머물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길』(요한17ㆍ21)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방법을 통해 그 분은 진리와 사랑 안에서의 신적 위격의 일치와 인간적 일치간에 유사점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 분은『너희들에게 평화를 남겨두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며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14ㆍ27)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평화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우리 크리스찬에게는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의무이며 또한 평화는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이 모든 피조물 위에 군림하고 따라서「만물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특별한 선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선물은 이성으로서 이는 곧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 자신의 권리와 동시에 다른이의 권리 및 이들 권리가 내포하는 의무를 인식하는 능력 그리고 사람의 생활을 올바른 목표로 나아가도록 지도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어느 누가 벌할지도 모르는 잘못을 시정할 능력 등입니다.
이성에 의지함으로써 인간은 문화적인 존재가 되며 그는 차이점을 폭력 사용으로만 해소하려고 들지는 않게 됩니다. 그 이성은 인간이 대화나 회합 또는 협상을 통해 해결점을 찾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 유명한 아우구스띠누스가「로마」행정관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으로 그는 가장 영광스런 칭호는『칼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 협상의 말들을 전쟁을 없애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불굴의 용기와, 확고한 희망 그리고 아량을 갖고 수행해야 할 임무입니다.
물론 이를 행하시란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현 상황에서처럼 가끔 어려움들은 실지로 거의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양 편이 정당한 의미의 국가적 명예를 포함, 상대방의 권리와 중요한 관심사를 상호 이해한다면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어떤 전쟁이라하더라도 그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전쟁이 화약 폭탄으로 불려지는 무기로 수행된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이 무기들은 치명적인 현대의 기술로 보강돼 대지를 황폐시키고 인명을 몰살시킵니다.
모든 책임자들은 저의 공경하올 선임자이신 삐오11세께서 버탄에 젖어하신 경고 곧『평화는 잃는 것이 없는나. 전쟁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말씀에 비추어 이런 측면을 신중히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평화의 왕자』(이사야9ㆍ6)로 인사한 그분의 메시지에 자신의 마음을 개방한 크리스찬들은 특히 이 점을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것을 초창기 크리스찬 공동체에 기대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국가와, 문화적인 전통ㆍ정신, 그리고 관심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구속되고 형제 자매가 되었으며 하느님 자녀들의 가정이 단 하나의 초자연적 기적의 가족들임을 깨닫습니다.
공경하올 형제 여러분, 그러고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전형적인 크리스찬 신앙의 증인이며 대변인이 되실 것을 요청합니다.
애국심의 정당한 요청을 존중하면서 평화가 가능함을 말과 표양으로 모든이에게 선포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공통된 인간 본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모두가 다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우리의 요청에 의해 성취 되는 사상과 의되 목적의 보다 높은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입니다.
주께서 인간적이고 크리스찬적인 지혜의 이 메시지를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 국민의 마음과 정신 안에 전달되도록 해주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양 국가 당국의 선의가 양 국민의 진정한 선익을 추구하고 또 현재의 긴장을 극복하는 한편 나아가「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리라」(시편84ㆍ10)는 원의가 실현 되도록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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