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신학교는 1887년 개교하여 1914년 대구 성유스띠노 신학교가 설립 될 때까지 27년간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성직자 양성 기관이었으며 1945년 4월 일제(日帝)의 강압으로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를 합병하여「경성 신학 전문 학교」(가톨릭 대학 신부 前身)로 되기까지 그동안 1백여명의 한국인 사제를 배출 하였다. 또 용산 신학교는 교육 과정에 있어 우리나라에서 서구식(西歐式)대학 교육의 효시이며, 이 학교의 건물이 또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서양식 붉은 벽돌 2층 교사(校舍)였으므로 교육 사적 의의와 개화사와 문화사적인 측면에서의 뜻도 크다.
우리 나라에서 신학교는 1856년 충청도 배론(忠北 堤川군 鳳陽면 九鶴里)에 세웠던「배론(舟論)신학당」이 효시가 된다.
1831년부터 한국 포교를 담당했던 프랑스의 빠리 외방 전교회는 포교 지방에서『그 본방인(本邦人)을 신부로 양성 해서 본방인 성직자들이 그 동포들에게 전교 하도록 한다』는 방침 이었으나 당시 우리나라와 같이 종교 자유가 없고 박해가 심한 곳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마카오」나「페낭」으로 유학생을 보내서 신부를 양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마카오」에는 1836년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최양업(崔良業 로마) 최방제 (崔方濟프란치스꼬) 등 3명을 유학 시켰고「페낭」에는 1845년과 1858년에 각각 3명씩 그리고 1882년부터 3년 동안에 모두 21명을 유학 보냈다.
「페낭」신학교는 빠리 외방 전교회가 그 포교 지역 내에 있는 중국 일본 월남 타이 등 여러나라 사람들의 사제 양성을 위한 국제 신학교로 세운 신학교였으며 그 위치는 말레이 반도 서쪽의 열대 지방이었으므로 기후와 풍토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맞지 않아 병을 얻어 고생을 하는 유학생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1884년이후는 학생 파견을 중단하고 국내에 신학교를 세워 차차 유학 가있는 신학생을 데려올 계획이었고 이러한 계획에 따라「한 불 수호 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87년 부흉골(釜坪里)에 있는 신학당을 용산의 함벽정으로 옮겨「예수 성심 신학원」으로 발족 시켰다.
「부흉골」은 당시 강원도 원주(原州) 부흉골이라 했는데(현재는 여주군 강천면 釜坪리)이때 임시 신학당을 산골인 부흥골에 두게 된 것을 조성정부와 프랑스가 수호 조약을 맺기 전이었으므로 프랑스 성직자들의 행동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함벽정은 현재 용산구 원효로 4가인데 당시 별장 지대로서 순교 성지인「새남터」의 서북쪽에 위치한 땅으로서 이 토지가 교회의 소유로 되는데는 열심한 몇 교우의 숨은 희생과 공로가 컸다. 이 곳은 조선 정부에서 기와를 굽고 있던 와서현(瓦署峴) 땅으로서 벽돌 만들기에 매우 적당한 흙이 많아 성당과 교회 건물들을 지을 벽돌을 모두 이 곳에서 만들게 되었다.
1887년 이 곳에 자리잡은 신학교는 1891년 광대한 연와 2층 교사를 신축하고 1910년부터는 대신 학원까지 증축 하였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