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 하롤드 대주교 (HenryW. Harold) - . 여는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선교사로 내한, 이 땅에 주검을 묻은「한국 국민에 바친한 평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한 평생은 여느 선교사와는 달리 활동폭이 넓고 뛰어난 공헌도에 있어서는 남달리 특출한 한 평생이었다.
크지 않는 체구에 호안(虎眼)의 玄 대주교는 소탈하고도 활달한 성품, 재기 넘치는 유우머의 소유자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고 존경받은「목자중의 목자」였다.
1909년 7월 11일 미국「미네소타」주「노스필드」시에서 출생한 玄 대주교는 1922년 8월 13세 때 성꼼룸반 소신학교에 입학, 5년간의 소신학교 과정을 마친 후 1927년 8월 성꼴룸반 대신학교에 입학, 1932년 12월 21일 사제로 서품됐다.
玄 대주교는 사제 서품을 받기 위해 소신학교까지 정통적인 과정을 거쳤으나 그의 부모는 철저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玄 대주교 역시 어릴적에는『가톨릭은 예수님을 안믿는「악마의 교회」로 알고 있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玄 대주교는 사제로 서품된 다음 해인 1933년 10월 29일 꼴룸반회 선교사제로 내한, 34년 5월부터 1년간 노안본당(전남 나주군)보좌 생활을 거쳐 35년 5월부터 41년 12월 8일 일본 경찰에 체포돼 수감될 때까지 6년 여동안 나주본당 주임 신부로 봉직하면서 호남 지방 선교와 인연을 맺었다.
일본 경찰에 의해 6월간 옥고를 치른 玄 대주교는 42년 6월 1일 미국으로 강제 소환돼 미국에서 잠시 신학교 교수를 역임하다가 43년 7월 세계 2차 대전 중 미군 군종 신부로 구라파 지역에 종군, 「노르망디」상륙작전 등에 종군했다.
종군 중 45년 1월 15일 미국정부로부터 동성 훈장을 받고 종전 후 45년 12월 미 육군 소령으로 예편, 재차 내한하기전까지 약 2년간 성꼴룸반 신학교 교수로 봉직한 후 1947년 11월 다시 한국을 찾았다.
玄 대주교는 당시 한국이 행방과 더불어 종교 자유를 만끽하는 가운데 교세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음을 주시, 각 군(郡) 단위에 본당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던 중 6ㆍ25동란을 맞아 공산군에게 준비해둔 자료를 압수 당하고 신설된 성당은 불에 타없어지는 시련을 겪었다.
또한 동란 중인 50년 8월 광주대목구장 安 빠뜨리치오 몬시뇰이 납북, 순교하여 50년 10월 광주대목구 대리감목으로 임명되어 난국 타개에 심혈을 쏟았다.9999
84년 12월 3일 광주대목구 감목에 임명 됐으며 57년 5월 11일 美「보스턴」교구장쿠씽 대주교 주례로 주교로 성성되고 62년 3월 25일 광주교구가 서울ㆍ대구와 함께 대교구로 승격되자 노기남 대주교 서정길 대주교와 함께 한국교회 최초의 대주교가 됐다.
玄대주교는 6ㆍ25동란후 11개성당이 대부분 소실ㆍ파괴 되었으며 신자 수는 8천명에 불과한 광주교구를 9ㆍ28 수복과 동시 파괴된 성당을 개축 또는 개수하는 한편 새성당 건립을 추진, 광주대교구장 재임중 42개본당으로 늘어났다.
또한 연 이온 한해로 굶주리고 헐벗은 난민ㆍ이재민을 구제하고 상이군경, 유가족등의 구호사업에 전력, 연인원 수백만 도민에게 헐벗음과 굶주림을 면케했다.
玄 대주교는 광주에 성요한 병원, 목포에 성꼴룸반 병원 등 2개 병원에서 극빈환자 구호 사업에 전력하는 한편 노안「현애원」과 소록도 등지에서 나환자 구호사업도 벌였다.
육영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그는 초ㆍ중ㆍ고교 7개교를 설립했고 한국의 제2대 신학교인 광주대건신학 대학을 62년에 설립, 성직자 양성에 크게 기여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62년 8월 15일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문화 훈장 수여를 비롯, 美 크레이트대학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 (63년 6월) 美 성토마스 대학 명예 문학박사 학위 (74년 5월 18일)광주 명예 시민증 및 목포 명예 시민증 수여 (66년10월15일) 제주도 명예 도민증 수여 (71년 6월 9일)보이스카우트 한국연맹 무궁화 훈장 수여 (67년 10월 17일) 광주YMCA고문 (68년 1월)등과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막사이사이」상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수상 경력만 일별해도 그의 업적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71년 8월 25일 광주대교구장직을 사임, 같은 해 9월 6일 제주지목구장에 취임, 76년 3월 1일 선종 때까지 제주교구에서 봉직했다.
현 대주교는 76년 3월 4일 오후 1시 한국인의 애도속에 제주 중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영결식을 가진 후 그의 마지막임지였던 제주시화북동 황사평교회 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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