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그레고리안 신학 대학에서 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는 광주대교구 소속 金喜中 신부는 한국의 천주교회사에서 안토니오 코레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면서 지금도 틈틈히 시간을 내어 안토니오 코레아의 족적을 추적하는 연구에 몰두한 유일한 한국 신부이다.
김 신부는 인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기술이 들어있는 프란체스코 카톨레띠(Francesco Carletti)의 저서「다른 나라들처럼 프란체스코 카톨레띠의 이야기들」을 탐독하면서 안토니오 코레아의 족적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인쇄본의「프란체스코 카를 레띠의 여행기」는「로마」국립 도서관과「바티깐」도서관에도 보관되어 있는데 필사본은「피렌체」에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보면서 김 신부는 한국의 農檀학회 발간 한국사의 근세 후기편 서양과의 접촉 부문중 1백28페이지에 나오는 안토니오 코레아에 관한 기록중『…때마침 세계를 일주하고 있던 이탈리아 전도사 카를레띠는 일본에서 조선인 포로 소년 5인을 노예로 사서 세례를 준 뒤…』라는 부분에 이 책의 저자가 전도사로 기술되어 있으나 카를레띠는 천도 도사가 아닌 상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도 노예 상인이었다는 것.
프란체스코 카를레띠가 아버지 안토니오 카를레띠의 명을 받아 1592년 스페인의「시빌리아」에 상술을 배우러 가있다가 아버지 안토니오와 함께 노예장사를 위한 세계일주를 위해 배를 타고 떠난 것이 1594년.
3년만이 1597년에 한국에 丁酉再亂을 일으켰던 일본에 도착, 다음 해인 1598년 3월에 일본을 떠났으며 이때 안토니오 코레아를 포함한 5명의 이조 소년들을 노예사로서 인도의「고아(Goa)」까지 데려 왔다고 기술되어 있다고 김 신부는 말했다.
1598년 안토니오 가톨레띠가 67세로「마카오」에서 별세하고 아들 프란체스꼬는 5명의 이조 소년들 가운데 4명을「고아」에다 떨쳐버리고 안토니오 코레아로 후에 명명한 소년만 데리고 1606년 7월 12일 이탈리아의「피렌체」로 돌아왔는데 이 과정의 여행기 기술이 상당히 우아하고 담담하게 단순한 필치로 잘 묘사되어 있어「카톨레띠의 여행기」는 이탈리아의 문학사에서도 그 글의 가치를 높게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라고 김 신부는 귀띔했다.
김 신부는 또한 프란체스꼬 카톨레띠는 개인자격으로 세계를 일주한 첫 이탈리아인 무역상으로 꼽히고 있어 마르코 풀로의「동방견문록」만 없었더라면「카톨레띠의 여행기」는 더욱 빛이 났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 신부가 이때까지 조사 연구한 이탈리아의 계보학(족보)에 의하면 코레아 씨 성은 전혀 발견이 안되고 있다는 것. 1978년에 간행 된「이탈리아 姓氏의 기원을 위한 어떤 기준」에도 코레아 姓은 나타나 있지 않으면 바티깐 도서관과 로마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이탈리아 姓氏사전」「족보사전」과 1925년도에 간행된「이탈리아 희귀이름 사전」에도 코레아 姓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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