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기 이 땅에 한알의 밀알로 태어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6월 27일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 가던 1932년 최초의 한국인 수녀회로 첫 발을 내디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창립후 채 뿌리가 내리기도 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6ㆍ25로 수녀회가 폐쇄되고 수녀들이 납치되는 등 이 민족과 함께 아픔을 겪으면서도 하나의 풍요한 나무로 성장, 오늘에 이르렀다. 이 나라 이 민족과 함께한 시련과 아픔의 시기를 딛고 일어서 이제는「순교자들의 꽃으로 활짝 피어난」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50주년을 맞아 애환의 50년 발자취를 정리해 본다.
『성삼위 한 마음에 고이 모시고 영원한 도움 아래 키우는 사랑 깨끗이 나를 살라 향불 올리며 아쉬운 모든이의 모든 것 되리』故 최민순 신부가 엮은 회가 (會歌) 에 그대로 담겨져 있듯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아쉬운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1932년 6월 27일 지금은 갈 수 없는 침묵의 땅, 평양교구 상수구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 한ㆍ미수호조약 체결과 더불어 세계 열강들과의 잇따른 수호조약 체결로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진 이땅은 점차 신앙의 씨앗이 커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탄생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보다 폭넓게 뿌리고자 노력한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헌신과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 오직 주를 따르는 삶을 살고자한 여성들의 원의가 하나가 되어 피어난 순교자의 꽃 그 자체였다.
1924년 내한, 평안도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메리놀 수녀회가 언어와 문화등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속에 국인수녀회 창립을 구상하던 31년 당시 평양교구장 목 신부 (Rev.J.E.Morris) 또한 그 필요성을 절감, 수녀회 창립을 적극 서둘렀다. 이 같은 준비 작업을 거쳐 1932년 6월 27일「영원한 도움의 성모」축일을 기해 8명의 첫 지원자와 지도 수녀 3명의 첫 지원자와 지도 수녀 3명 (메리놀희) 은 목 주교의 집전으로 첫미사를 봉헌, 수녀회 창립을 선언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에 태어난 수녀회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를 수호자로, 길의 안내자로 모시고 이당의 모든 민족에게 영원한 도움을 주기 위해 힘찬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35년 메리놀희 소속 한국인 장정은 (앙네따) 수녀가 지원자들의 지도 수녀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 됐으며 같은 해 회칙과 설립인가 신청서를 로마 교황청 수도자 성성에 제출했다. 이때 이미 지도 수녀 7명, 청원자 9명, 지원자 12명 등 모두 28명으로 수녀회의 면모를 갖추었고 수련 과정에 성서연구ㆍ교리ㆍ교회음악 ㆍ 일반 교양학과동이 포함돼 말씀을 봉사하기위한 제반 준비 과정도 어느정도 자리가 잡혀 가기 시작했다.
38년 9월 19일 교황청으로부터 수녀회 설립과 회칙을 정식으로 인준 받은 수녀회는 16명의 청원자로 첫 수련을 시작, 40년 11명의 첫서원 수녀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부모 친척 신자들의 축복속에 평양 관후리대성당에서 거행된 첫 서원식은 평양교구는 물론 한국교회 전체에 가능할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안겨 주는「대사건」이었다. 수녀들이 양성되자 30여년간 평양교구에서 봉사하던 샬뜨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 그 소임을 인계하고 40년 서울 본원으로 구원했으며, 7월부터 평양관후리ㆍ대신리ㆍ서포본당과 평북 비현ㆍ신의주 마전동본당에 전교 수녀들이 파견 돼 영원한 도움의 첫 봉사는 시작됐다.
성장을 향해 발돋움하던 수녀회의 새싹은 2차 대전의 발발로 무참로 무참히 짓밟히는 시련의 시기를 맞았다. 전쟁발발과 함께 일제가 평양교구내 메리놀 성직자 수도자 전원을 감금하는등 사태가 긴박해지자 오 주교는 41년 장정은 수녀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의 초대 원장으로 임명, 메리놀회로부터 자립시켰다. 이때 메리놀회로부터 나누어 받은 전 재산은 현금 1백60원(쌀8가마 상당) 이 전부였다.
이듬해인 42년 미국으로 강제송환되면서 넘겨준 선포 교구청 건물과 대지ㆍ전답을 관리하는 등 어려운 시기에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해온 수녀회는 전쟁말기 일제의 발직적인 착취로 생활속에서도 수녀회를 떠나려 하지 않고 묵묵히 봉사자의 자세를 지켜 나갔다.
45년 가슴 태우며 고대하던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소련군과 공산당의 북한 진주로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는 북한 전역을 어둡고 참담하게 만들었다. 교회와 수녀회에 대한 공산당의 잔악한 탄압이 날로 심화 되어 가던 45년 제1회 종신서원 예정자들을 면접하기 위해 선포수녀원을 방문했던 홍용호 주교가 귀가 도중 행방불명 되는 것을 깃점으로 각 본당 성직자들이 연이어 납치당하는 등 암흑의 시대가 극에 말했다.
50년 수녀원 건물을 몰수당하자 수도 생활이 불가능해진 수녀들은 기약없는 재회를 약하며 귀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도회원들은 어디를 가든지 북괴의 소위 정치 보위부의 감시망을 벗어 날 수 없었고 장면 박사를 오라버니로 둔 원장 장정온 수녀는 그들의 검은 손을 벗어 날 수는 더욱 없었다.
지병인 척추병으로 기브스를 하고 송림리 공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장원장 수녀는 50년 10월 4일 인민군에의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는 불편한 몸 그대로 달구지에 실려 갔다. 한국교회의 첫수녀 양성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고난의 시기에 맡았던 장정은 수녀는 친절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언제나 단정하고 예모 바른 태도로 회원들에게 수도자의 참된 길을 일깨워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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