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현(藥峴 = 中林洞)성당은 우리나라 서양식건축으로된 성당 중 맨 처음 준공 된 성당이며 종현(鐘峴=明洞)대성당과 같은 설계자에 의하여 건립된「네오·고딕」양식(樣式) 건물이다.
약현본당(本堂)은 종현 주교좌 본당에서 분할된 소교구(小敎區)로서 종현이 도성 안에 있다는 뜻에서「문안 성당」이라 했음에 대하여 성 밖에 사는 신자들의 중심지로 설정된「남대문 밖 약현상 성당」이라 했다.
1886년 5월 한불 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된 후 서울의 천주교 신자는 증가 일로에 있어 당시의 교구장 블랑(J.Blanc 白主三) 주교는 이에 대비하여「수렛골」(車洞=현巡和洞)에 집 한 채를 사서 교리 강의 소로 사용하는 강당을 마련 했는데「수렛골」은 기해교난(己亥 = 1839년)과 병인교난(丙寅 = 1866년)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참수 치명(斬首致命)한 순교지인 서소문(西小門)밖 네거리의 바로 북쪽에 있는 땅이었다.
「수렛골」강당에 모이는 신자는 그 수가 늘어나 1890년초에는 9백 50명이 넘게 되었는데 이는 5백 86명에 불과 했던 종현 본당보다 훨씬 많은 신자수였다. 이때 블랑(白) 주교는 자신이 직접 맡았던 주교좌 본당 사무를 두세(E.C.Douce 丁加彌) 신부에게 위임하고 교구장으로서만 일하다가 2월 21일 별세하여 1890년 9월 21일 뮈델(Mutel 閔德孝) 주교가 조선 교구 제 8대 주교로「빠리」에서 서품 되어 1891년 2월 23일 서울에 부임 하게 되자 두세(丁) 신부는 새교구자에게 정현본당을 부활해서 문밖에 새본당 하나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설명 했던 것이다.
서울에 새본당 하나를 신설하게 되고 창설의 책임을 두세(丁) 신부가 맞아 약현(藥峴)이라 했던 합동(蛤洞=中林洞)언덕위 김군선(金君善)의 산전(山田)과 이 땅에 인접한 토지를 사들여 성당 부지로 확보하고 1891년 10월 27일 정초식(定礎式)이 거행 되고 건축 공사가 진행중이던 1892년 본당 설정과 첫본당 신부의 임명이 정식으로 발표 되었다.
남대문을 내려보며 종현 언덕을 마주 볼 수 있는 합동 언덕 위 2천 9백 여평의 대지에 건평 1백 20평으로 세워지는「네오·고딕」식의 성당은 착공 1년만에 주문 했던 성종져 약1년을 더 기다려서 1893년 9월 25일 드디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성당」이라고 이름 붙있수 있는 건물의 헌당식(獻堂式)이 뮈뗄(閔) 주교의 집전으로 거행되니「고댁」성당의 동근 천장 및에서 처음 봉헌 되는 미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감회와 감격은 어떠했을까.
성요셉을 주보(主保)로 모신 약현성당은 종현(明洞)주교좌 대성당이 아직 준공 되지 못한 때였으므로 주교좌성당의 구실도 얼마 동안 했던 것이니 즉 용산 신학교의 첫 졸업식이며 국내에서 최초로 행해진 첫 사제서품(서품자 3인)식이 1896년 이 성당에서 거행되고 두번째의 서품식(서품자3인)이 1877년 또한 약현 성요셉 성당에서 거행 되었던 것이다.<계속>
♣고침
지난 1312號 本面 사진 약현성당은 한국 교회사 연구소 제공으로 바로 잡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