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놀 회원이면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의 초대 원장을 맡아 고난과 희생으로 수녀회를 키워온 장정온 수녀가 납치돼 가면서 남긴『그 분의 뜻이라면 가야지』그 한마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 수도자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해 주었다.
이어 평양 선교지 본가에서 서원석 수녀가 가족과 함께 납치돼 어두운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져 갔다.
그해 10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는 등 전세가 역전되자 평남 지방에 흩어져있던 서원 수녀 16명과 1명 수련자는 평양 상수 구리 수녀원에 모여 본격적인 재건에 착수하는 한편 평양교구 복구작업을 위해 각 본당에서 또는 구호병원에서 정신없이 뛰며 봉사에 임했다. 그러나 감격과 희망의 순간은 잠깐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평북으로간 9명의 수녀들의 생사로 모른채 평양교구장대리로 임명된 안 몬시뇰의 도움으로 50년 12월 2일 17명의 수녀들은 서울을 향해 피난길에 올랐으며 다시 9일 부산에 도착, 메리놀 수녀회의 방 하나를 얻어 공동생활을 시작 했다. 51년 메리놀 병원이 개원되자 병원 일을 도우면서 군부대의 세탁일과 자수 등으로 생계를 유지한 수녀회는 그런 와중에서도 피난민과 고아들을 돌보고 교리를 가리치는 등 수녀회의 사명을 다했다.
51년 6월 27일 3명의 수녀가 첫 서원을 함으로써 궤도를 잡기 시작한 수녀회는 메리놀 수녀원에서 독립가옥으로 이사, 남한에서의 첫 지원자를 받아 들이는 한편 다음 해 전쟁의 와중으로 연기 됐던 수녀들의 제 1회 종신 서원식을 거행하는 등 눈물과 절망 속에 어둡기만한 것 같았던 뼈 아픈 현실을 딛고 일어난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희망 속에 수녀회를 키워 나갔다.
휴전 후 사회가 점차 안정 되자 평북 출신의 박덕현 회장의 도움으로 서울 영등포 흑석동에 집 한채를 마련, 55년 이사한 수녀회는 같은 해 수녀 옆에 의원을 개원하고 의료 봉사를 시작 69년에는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으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해마다 입회자도 늘어 청주교구를 비롯 여러 교구에 전교 수녀를 파견하는 등 활동 범위를 크게 확대시켜 나가던 57년 첫 총회를 개최, 2대 강 베드로 수녀 후임에 파물라 수녀를 3대 총원장으로 선출, 비약을 향해 뜨거운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59년 춘천교구장 구 토마 주교의 배려로 춘정에 수련소를 개설한 수녀회는 69년 서울 본원으로 수련소를 합칠 때까지 70명의 수녀들을 양성, 범교구 차원에서 전교활동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60년대의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는 획기적인 발전을 향한 기틀 마련의 시기였다. 조용한 정통 공짜기에 수녀회의 복원을 마련했는가 하면 외국 선교에도 눈을 돌려 수녀와 학생 지도자를 파견하는 등 실로 눈부신 성숙이 거듭됐다.
그것은 두고 온 산하, 부모 형제, 그리고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북한의 상수 구리 모원에 대한 향수를 달래면서 의지와 의욕과 헌신의 노력을 집약했던 20여년 각고의 결실이었다.
이 시기에서 수녀회는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후 쇄신에 대한 적응 부족과 더불어 성장에 가려져 있던 행정 조직 관리력 등의 결핍으로 어쩔 수 없는 약간의 혼란기를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죽음까지 불사했던 북한교회 당시의 교훈은 이같은 어려움을 또 다른 성장을 향한 디딤돌이 되도록 이끌어주는 큰 힘이 되었다.
70년대 들어 박숙안 수녀를 6대 총원장으로 선출한 수녀회는 제2차「바티깐」공의회 정신에 따라 수도생활을 쇄신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회헌을 개정하는 한편 특별총회를 개최, 개정된 회헌을 시험 용키로 의결시행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자체 쇄신과 사회 복음화에 한걸음 다가섰다.
또한 성서를 중심으로한 선교 방향을 새롭게 설정, 71년 성서 연구 모임을 구성하면서 가톨릭 성서모임을 탄생시켰다.
72년 수녀회 창립 40주 주년을 맞이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기념 미사를 비롯 기념 행사를 개최,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성장해 온 40년 역사를 되 새기고 한국 교회의 맏딸 답게 더 큰 봉사로 교회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했다.
74년 7대 총 원장에 이영자 수녀를 선출한 수녀회는 그해 말 유백룡씨의 도움으로 인천 가정동에 홍용호 주교 기념 성당과 기념관을 건립, 북한 교회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을 대변해 주었다. 이 시기는 또 수녀들의 영성 생활을 강화하고 내적 성숙을 위해 연차적으로 2개월 간의 재수련기를 두는가 하면 수녀들에게 교회의 모든 신심 운동에 적극 참여토록 함으로써 공동보조를 통한 봉사에 주력했다.
또한 청소년 사목에 대한 특별한 관심 속에 지도 수녀들을 파견하고 교육관을 개관, 불붙기 시작한 성서공부를 집중적으로 지도, 봉사할 수 있는 센타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78년 곽경애 수녀를 제8대 총원장으로 선출한 수녀회는 80년, 현대사회의 요청에 따라 수녀회의 획기적인 방향 전환을 일환으로「흑석동」을 25년만에 폐원 했다. 대신 그해 경기도 용인에 소규모의「소화의원」을 개설, 영세민들을 위한 진료에 나섰다. 그것은 이 민족과 함께한 아픔을 딛고 끊임 없는 노력과 땀으로 성장해온 수녀회가 당연히 해야할 최우선의 사업이었다.
창립 초기부터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맥락을 함께 해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사실 그때 그때 당면한 생활과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 자신을 깊숙이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70년대에 들면서 그동안 성장한 그들을 토대로 수녀회 자체로 눈을 돌리기 시작, 70년대는 수녀회의 창립 목적과 정신을 재정립하기 위한 쇄신과 변화의 시기였다고 지적할 수 있다.
현재 2백26명의 서원 수녀들과 1백여 명의 수련 수녀 등 대식구로 불어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75년부터 도입 실시한「성이냐시오 영성수련 방법」으로 영성 심화에 모든 촛점을 맞추는 한편 순교자의 꽃으로 이 땅에서 태어난 한국 교회의 맏 딸답게 이 민족의 복음화에 총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민족의 복음화야 말로 이땅 이 사회에 맡겨진 최대의 사명이자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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