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교회
포르투갈인이 처음으로 일본에 도착한것은 1492년이다. 그 후 7년만에 이 곳에서 일본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프란치스꼬 드 사비에르에 의해서 선교 활동은 시작되었다. 그가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에 일본 천황은 실천없는 이름 뿐인 국가 원수었고 2백50여 명의 다이묘들이 서로 다투고있던 전국시대였다 사비에르는 이러한 정치와 사회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성공적인 선교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항구적인 성공은 다이묘들을 설득하는 거이라고 판단하여 이들의 지지와 신용을 얻는데에 도움이 되는것은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서민적 태도로 선교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자신이 다이묘 복장을 하는 등 적응을 위한 노력은 그가 1551년에 일본을 떠난후에 결실을 맺었다. 예수회원들이 교리가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일본의 관습에 적응하면서 선교 활동을 계속한 결과로 1563년부터 다이묘들이 개종하기 시작했고 한 다이묘들이 개종하기 시작했고 한 다이묘들의 세례는 그의 많은 부하들이 그리스도교인이 되게 했다.
1579년에 알렉산드리 발리냐노가 예수회의 극동 지방 순찰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선교사 정치가 외교가로서 사비에르 다음으로 일본교회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일본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학교를 설립했던 발리냐노는 1587년에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외국 선교사들의 추방령을 내렸을 때에 능숙한 외교로 교회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도꾸가와 시대에 교회는 결국 박해를 받게 되면서 일본의 교회는 서서히 소멸되어 갔다.
1577년 이래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그레고리오 드 세스페데스(1515 ~ 1611)는 임진왜란 때에 고니시 · 유끼나와의 초청으로 군종 신부로 1593년 말에 입선하여 약 1년 반동안 체류했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세스페데스가 토착 조선인에게 선교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어떤이들은 선교의 불가능을 내세우고 있다. 그것은 조선인이 일본군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진지를 공터화하여 세스페데스가 주민들을 접촉 할수 없었고 또 그들의 정복자인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 군종 신부는 말을 건넬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중국(명 · 청)교회
중국에서는 이미 원제국 시대에 가톨릭 교회가 전래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말을 믿는다면 원의 세조인 쿠빌라이(1215 ~ 1294)는 1265년 입조한 마로코의 부친과 삼촌을 사절로 교황에게 파견하면서 신앙심 굳은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을 보내어 원의 학자들과 교리를 토론하기를 원한다는 편지를 전달하였으나 교회는 호응하지 않다가 20년 후에 교황 니콜라스 4세(1288 ~ 1292)가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몽떼코로비노의 죠오반니를 파견 하여 선교에 성공 하자 「칸발리크」(지금의 북경)의 대주교로 죠오 반니를 임명했으나 교회는 원의 멸망과 더불어 중국에서 사라졌다. 다시 마태오 릿치가 로마를 떠나 「고아」「마카오」「남경」등지를 거쳐서 1601년에 황제의 윤허를 받고 이 후 10년 동안 「대도」에 머물면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용어에 알맞는 중국어의 발견과 그리스도 신앙을 중국 관습에 적응시키는 방법의 결정 등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중국인에게서 외래의 것을 꺼리는 성격을 발견한 릿치는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려면 가능한 한 외국적인 것을 극소화 해야 했다. 우선 신에 대한 명칭을 일반적으로 「천주」란 단어를 사용했다.
1644년 명나라가 망했으나 청(淸)왕조도 역시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갖고 있어 선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1664년 선교사들이 국가 정복을 꾀하는 포르투갈의 간첩으로 몰리면서 교회는 한 때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강회제는 페르디난트 베르비에스트와 친교를 맺고 있었던 관계로 1666년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 정책을 취소하고 1692년에 관용칙서를 반포, 성직자들의 무죄함과 교리가 정당하다고 선언했다. 이때 부터 예수회의 선교사는 물론 도미니꼬 수도회(1631년 입국)와 프란치스꼬회(1633년 입국)의 선교사들도 신변의 안전이 보장 됐다.
17세기 중업부터 수도원간의 전례 논쟁이 일어나 중국교회는 혼란에 빠지고 박해도 연장됐다. 새로 들어온 수도회들은 예수회가 귀족의 인기를 얻고 박해를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매도 했다고 생각했고 예수회는 새 선교사들이 중국인의 정신을 이해 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이제까지의 선교 업적을 파괴하려고 한다고 반박했다. 쟁점은 장례 관습, 조상공경(제사), 신에 대한 표현 용어였다.
1656년 교황청은 공자와 조상 공경은 민속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허용할 수 있다고 명백하지 않는 용어로 규정하였고 예수회원은 이 결정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 있던 교황 감독 대리인 샤틀르 매그로(1652~1730)는 예수회의 선교 정책을 비난하면서 신에 대한 상제 또는 천(天)의 사용과 조상 숭배의 관례를 금한다고 결정하여 이를 교황청에 발송했다.
이에 예수회는 황제에게 조상 제사와 용어를 규정해줄 것을 청하자 황제는 공자에게는 입법자로서 예를 드리는 것이고, 조상에 대한 제사는 사랑의 증거이며 죽은이의 업적을 기억하는 것이며 天은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최고 주인을 의미한다고 답했다. 예수회는 황제의 답변을 교황청에 보냈다. 이때 로마의 신학자들은 천주란 단어만을 사용할 수 있으며 공자나 조상에게는 어떠한 제사도 금지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교황 끌레멘스 11세가 1701년 특사로 동양에 파견한 벨라르드 드 뚜뜨농은 1705년 중국에 도착, 당시의 상황은 파악하지 않고 예수회의 관례에 속하는것은 모두 금한다고 명령 하였다. 1751년, 교황은 중국에서 마태오 릿치가 시행한 토착화 방법을 금지시켰다.
1742년 베네딕또 14세가 그의 칙서로 끌레멘스 11세의 결정을 재확인했다. 이 결정은 향후 2백년간(1939년 조상 제사에 대한 금령이 해제 될 때 까지)가톨릭 선교 활동을 지배해온 장애였다. 그리스도교 토착화에 대한 시도는 좌절되었고 이는 중국과 조선(한국)에 박해의 원인이 되어 교회 발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결정이야말로 선교 역사에 있어서 교황청의 큰 과오라고 지적되고 있다.
한국교회
중국의 선교사들, 특히 예수회원들은 그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착화 정신에 입각,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인들이 그리스도의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수많은 종교 서적들을 번역하거나 저술했다. 이 때 조선은 중국에 사대의 예를 다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또는 임시로 「북경」에 부연사들이 조정으로부터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 사절들 중에서 어떤이들 - 예컨대 정두원 · 이이명 · 홍대용 등은「北京」이 천주당(성당)을 방문하여 교회 내부를 구경하고 그 곳의 선교사들과 필담을 통해 서양의 과학과 종교에 대해 토론하고 과학서와 종교서를 받아 귀국했다.
이렇게 사신들을 통해 전래된 한역 종교 서적은 조선의 학자들에 의해 연구 되었는데 일부는 주자학 적인 입장에서 비판, 반발하여 거부했고 또 일부는 수용, 실천하였다.
전자에 속하는 이들은 유몽인 · 이익 · 신후담 · 안정복 · 홍정하 등으로 이들은 천당지옥설 · 성직자의 독신생활 · 천지창조론 · 신육화 · 그리스도의 신성 · 일부 일처의 윤리관을 비판했다. 그러나 후자는 이벽을 중심으로 1777년 또는 1779년에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교리를 연구한 권철신 · 권일신 ·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 이승훈 등이다. 이 모임은 교리 연구 뿐만 아니라 일종의 수련회와 같은 것이었다.
1783년 이승훈이 그의 부친을 따라 「北京」에 가게 되었을 때 이벽은 이승훈에게 「北京」의 천주당을 방문하여 성직자를 만나 교리를 문의하고 세례를 받고 교리 서적을 얻어오도록 부탁했다. 「北京」에 도착한 이승훈은 적당한 성당이 북당임을 알고 방문했다. 여기서 루이 드 그라몽이란 프랑스 신부에게 교리를 배우고 1784년「北京」을 떠나기 직전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했다.
이승훈은 귀국한 후 천진암 교리 연구 회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요한 세자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후 즉시 전교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의 천주교는 초창기의 가성직시대(1786~1787년)을 거쳐 성직자 영입운동을 꾸준히 벌이면서 동시에 박해속에서 굳게지킨 신앙은 2백년 역사의 밑거름과 씨앗이 되었다.
여기서 한국 천주교의 특성이며 자랑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라는것을 지적 하고자한다. 그러나 이외에도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 조상들이 자발적으로 외국 신앙을 연구한 뒤에 받아들인 사실이다. 무조건 호기심에 위해서라기 보다 신중한 연구결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용 실천 한 것이다.
아울러 다른 교회에서 볼 수 없는 또 한가지는 꾸준하면서도 열렬했던 성직자 영임 운동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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