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大韓光武2)년 성신강림 대축일(5월 29일) 이 날은「조선성교회 광양의 날」이었다.
종현(鐘峴 = 明洞)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이 강산 최초의 까떼드랄(주교좌성당)「무염시태(無染始胎)성모= 원죄 없으신 성모」대성전이 축성되는 날로서 이 날 오전 새 성당에는 3 천여명의 신자들을 비롯 하여 한국 정부의 고관과 수교(修交) 각국의 외교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대 목구 제 8대 교구장 주교의 집선으로 건물 축성과「종(種)세례」에 이어 미사 성제로 장엄하게 거행 되었다.
뭘뗄(Mutel 閔德孝) 주교는 감격에 넘친 목소리로『기쁨이 마음과 얼굴과 소리에 넘칩니다. 그렇게도 오랫동안 분쟁이 되었던 이 땅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간 순교자들을 생각합니다. 순교자들의 피의 댓가로써 우리는 이 같이 값 비싼 영광을 얻었읍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행복한 증인입니다』
1784년 바로 이 자리가 되는 당시의 명례방(明禮坊) 김범우(金範禹 = 토마)의 집에서 한국 천주 교회가 발족된 이래 103년 동안의 혹독한 박해의 돌개 바람 시대를 지나「한 불 수호조약」으로 선교의 자유가 묵인되고 외국 선교사의 부동산 소유도 인정은 되었으나「영희전(永禧殿)」이 가깝게 있는 이 종현 땅 만은 풍수설과 또 다른 이유로 이 곳에 성당 건립하는 덕을 한국 정부에서 허용 하지 않아 그간(1888 ~ 1890) 정부와 교회사에서 토지 분쟁이 있었던 것이다.
1887년 5월 한ㆍ불조약이 비준되자 제 7대교구장 불랑(Blanc 白圭三) 주교는 그동안「돌우몰골」(石井洞=현小公洞 부근)과「새문안」을 전전하다가 대 성당 건립 후보지로 존현 일대의 땅을 구입하고 교회의 시설과 부속 사업을 교회의 시설과 부속 사업을 이 곳에 모우기로 하였던 것이며 이해의 하반기부터는 정지작업을 시작 했는데 신자 들은 종교 자유의 증거가 될 대성당의 건립을「성교광양」이라 하여 정지 작업에 힘을 모았다.
서울과 인근 지방 교우들이 3일간 씩 정지 작업에 근로 봉사 하였고 12월과 1월의 혹한에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놀라운 열성을 보였으며 어린이들도 한 몫끼어 일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부녀자들은 일꾼을사서 보냈으며 또 먼 지방 교우들은 성금을 보내왔다. 이렇게 신자들이 기쁘게 봉사하는 공사장에 포졸들이 몰려와 공사 중지를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정부와의 토지시비는 1890년 1월「토지문권」이 정부로부터 교회에 반환됨으로써 교회의 소유로 확인 되었다.
1890년 2월 21일 이 문제로 고심하던 불랑(白 )주교가 별세하고 1892년 5월 8일 새로 주교가 된 뮈뗄(閔)교구장의 집전으로「원죄 없으신 성모」꼐 봉헌한 대성당의 머릿돌축성으로 기공식이 올려진 6년 21일만에 낙성된 종현대성당은 한국 천주 교회 승리의 상징이다.
낙성이 있기까지의 수많은 난관과 애로 그리고 많은 화제들은 다 이야기 할 수 없는데 이 축성식에 참석한 한 국정부 고관 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손자가 있었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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