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꼬 7 · 15)
오늘 우리의 주위를 기울이게 될 예수의 이 말씀은 군중들에게 향한 것이 었읍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의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양욕을 위해 섭취하는 음식은 그 영향이 단지 신체적 영역 안에서 소모될 뿐, 마음 속까지는 파고 들지 못하므로 도덕적 불순의 동기가 될 수 없다고 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그를 불순 하게 만드는 것, 즉 하느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 합당치 못하게 하는 더러운 음식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정한 음식을 먹는 것은 도덕적 종교적 의미에서의 순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자세는 그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한 것이었읍니다 실상 유다인들은 관습으로 묶어둔 음식에 관한 금기를 지키고 있었고 이런 식으로 또한 다른 금지해야 하는 관념들을 고집하고 있었읍니다.
천지 창조를 긍정적으로 평가 하셨던 예수께서는 깨끗한 동물과 더러운 동물을 구분하는 것, 그 결과로 음식에 있어 규정짓는 것들에 종말을 가져다 주셨고, 원래 온 인류를 향해 개방되어 있던 예수께서는 이방인 세계가 초기 크리스찬 공동체로부터 멀어지게 될 수 있는 저해점을 뽑아 버렷읍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 중 이 두번째 부분은 사람을 진정으로 더럽히는것을 뜻하니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의 내부로부터, 그의 마음으로부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탐, 시기, 증상, 교만, 어리석음」 (마르꼬 7 · 21) 과 같은 예수께서 열거하시는 나쁜 생각들과 「좋지 못한 지향」들이 솟아납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찬 정신은 깨끗한 음식과 더러운 음식을 구분하던 것을 폐지한 고로 (도덕은 양심에 따라 결정 되어 지며 종교는 내면적인 것임을 확정함으로써), 이미 설명된 의미 대로 예수의 말씀 중 첫 번째 부분이 이제는 더 이상 적용 되지 않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오늘날 역시 바로 인간의 마음이 나쁜 생각 내지 좋지 못한 원의를 낳게 하는 성향을 띠고 있음을 강조 해옴은 지나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가 아니라면 폭력 행위 패락 주의 도둑질 강탈 마약 복용 사기 보복 적대 살인 그리고 현대의 다른 여러 진정한 불행 등 많은 악이 물든 세상은 어디서 나오는가요?
예수께서는 천지창조를 긍정적으로 보시면서도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 되었음을 인정하시면서도 인간성과 그의 악의 성향을 알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이 말씀으로부터 그분의 도덕적 엄격함이 명백히 드러나고 또 청명하게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맑은 샘물에서 처럼 선한 생각들과 나무랄 데 없는 행동들이 솟아나는 순결하고 진실한 마음을 만들어 주고자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 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
만일 밖으로부터 오는 것들, 물건이나 음식 등 모든 것들이 우리를 더럽히거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아, 그의 마음, 그의 결정들이 오히려 덥힌다면, 예수께서는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태도의 깊은 동기에 대해 우리가 실지로 심사 숙고 하도록 원하신다는 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예수께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하는 단 하나의 동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이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살인하지 않으며, 중상 모략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배반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 24시간동안 사랑이 우리를 인도 하도록 합시다. 즉 하느님께 대한, 또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백 퍼센트의 크리스찬이 될 것입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