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辛丑)제주 교난」(濟州敎難)이라 불리는 1901(대한光武5)년 5월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발단된 민란(民亂) 제주도 교난은 천주 교인과 양민 7백여 명 학살 사건으로 신교 자유가 보장된 상황하에서 한국 교회가 겪은 큰 수난이며 앞서 백여년동안 여러 차례 겪었던 교난과는 그 성격이 다른 교난이다.
제주도에서 가톨릭 교회의 교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섬 중문(中文)면 색달(穡達)리에 사는 양씨 (베드로)가 육지에 머무를 때에 영세하여 제주에 돌아와 서신씨 형제와 (아우구스띠노 · 바오로)보성(保城)리 김생원과 강씨(도비아)에게 전교하여 네 집안이 열심 수계하며 신부 보내 주시기를 고대 하던 중 1899년뻬이네(C.Peynet)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金元永 = 아우구스띠노) 신부가 제주도의 첫 전교 신부로 부임하여 베이네(배) 신부는 제주읍에, 김 신부는「한논」(西歸面好近里)에서 전교하게 되었는데 뻬이네(배) 신부는 이 지방의 기후 풍토가 체질에 맞지 않아 다른 곳으로 전근되고 말셀노 · 라꾸우스(M.Laccou-ts 究瑪瑟)신부가 1900년봄에 부임 하였다.
1901(辛軸)년초에는 영세자가 2백 42명 예비자가 6 ~ 7백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갑작스런 교세의 증가 였다.
당시 제주도의 행정구역은 1목(牧) 3군(郡)으로 목사(牧使)아래 군수가 있고 한라산 북쪽에 있는 제주군과 남쪽에 있는 대정(大靜) 정의(旌義)등 3개군으로 편성되었으며 인구는 4만명 내외였다.
「한불조약」(韓佛條約 =1886년)을 계기로 1세기에 걸친 나라의 천주교 탄압은 끝났으나 유학(儒學)적 전통과 인습에 젖었던 당시의 일반 관습은 일조 일석에 변하는 것이 아니어서 지방에서는 부패한 관리와 완매(頑昧)한 토착 세력과 비타협 적인 교인(신자)간에 충돌과 분쟁이 자주 있었는데, 제주 교난은 이러한『교뇨(敎뇨) 사건』이 민우(民優)로 확대된 불상사였다.
신축교난은 제주도 토착인들과 토착인 관리들, 서울에서 온 봉세관(봉稅官)과 유배죄인(流配罪人)과 일본인 어업자(漁業者)들, 그리고 그곳 선교를 위해 와있던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 신자 사이에서 발생한, 경제적 · 사회적으로 대단히 복합적인 상황과 원인으로 서로 충돌을 피할 수 없었던 여건에서 생긴 대규모의 민란(民亂)이었다.
당시의 목민관(牧民官)들은 모두 탐관 오리들로 백성들의 원한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서 비롯 되었는데, 1900년부터는 중앙에서 봉세관이 내려와 토지 · 가옥 · 수목 · 어망 등을 온갖 잡세(雜稅)를 거둬감으로써 도민의 원성은 더욱 높았던 것이며, 이때 새로 입교한 신자 중에는 진리나 신앙보다 천주교 신자가 됨으로써 얻는 헤택 때문에 교회를 찾는 무리들도 섞여 있었던 것이며, 그 무렵 프랑스 신부들에게는『나와 같이 대우하라』(如我待)는 칙령(勅令)이 내려져 있어 외국 성직자는 나라의 이「호조」(護照)를 갖고 있었으므로 신부들의 권력을 노리고 신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이런 무리 중에는 악질 관리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섬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기까지 하는가 하면 또 천주교 신자가 국유지나 공유지를 불하 받아서 거기 있는 신목(神木) 신당(神堂)등 토속 신앙의 대상들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섬사람들과 충돌이 있었으며 한편 천주교가 번창하는 것을 시기하고 있던 무당들과 퇴기(退妓) 관기(官妓)들 그리고 제주 근해에서 우리 어장과 어업을 침식하고 있던 일본 어업자들의 계교가 작용해서 천주교에 대한 도민의 감정은 악화 일로 였는데, 대정(大靜) 군수 채구석(蔡龜錫)이 토착 세력들을 규합하여 만든「상무사」(商務社)사원과 교인(신자)들과의 소규모 감정적 대립이 확대 되어 일어나게 된 이 사건은 특히 일본식민주의 · 한국 진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일본인들은 상무사를 원조하고 무기를 공급하고 배후 조종을 했던 것이다.
1901년 2월부터『성당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도민들 선동하고 몇차례의 집회 끝에 드디어 신부들이 서울에 피정간 사이에 5월 11일 채구석과 오대현(吳大鉉), 배교자 강우백(姜祐伯) 등이 선봉이 되어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총 칼 등으로 무장한 폭도들은 동진 서진으로 편대하여 제주 읍성을 점령 하려고 황사평(黃沙坪)에 집결하여 행동을 개시했는데 이 때 신자들은 위험을 느껴 성 안에 있었으며 서울 수비하기 위해 목사에게 무기고를 열 것을 요청, 성의 수비를 맡아 제주성을 포위한 폭도들과 치열한 공방전을(5월 16 ~ 28일)계속 했으나 성안에서 폭도들에 동조한 부녀(妓女와 무당)들이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5월 29일 유래 없는 잔인 무도한 동족 동향인 살해의 망행이 벌어졌던 것인데 관덕정(觀德亭)앞에서만 1백 50여명의 신자와 양민이 무참한 죽음을 당하고 다른 곳에서도 5 ~ 6백명이 피살 되었다.
결국 관군이 두 척의 군함으로 급파되고 프랑스군함 2척과 일본군함 1척까지 출동 해서 폭동은 20여일 만에 일단 종식은 되었지만 사건의 뒷처리 때문에 프랑스 · 미국 · 일본 등이 개입한 국제 문제로까지 확대 되었던 크나큰 비극이었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