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肉化)의 신비
하느님의 사랑은 밖으로 넘쳐 흘러 나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이 무한한「사랑」이시며 절대적인「자기양도」이심을 가장 뚜렷이 나타내는 일은 바로 예수의 탄생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이것은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며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신비이다. 인간은 이 신비의 온전한 의미를 영원히 이해 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이신 예수
예수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계시되었으며 하느님의 마음이 알려졌다. 예수는 당신의 가르침과 언행을 다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시하셨고, 당신의 일생과 죽음과 부활을 다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 주셨다.
예수안에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깊숙한 신비를 드러내셨고, 당신의 최종적인 말씀을 행하셨다 예수야 말로 하느님의 절대적인 계시이시다.
더우기 십자가 위에서 죽으려고 하신 예수의 모습은 하느님의 사랑의 궁극적인 표시이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남김없이 비워 내놓으신 예수 - 이 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최대의 계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은 그렇게까지「사랑」이시며 그렇게까지「자기양도」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인간이되신 육화의 신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안에 완성된다. 하느님은 바로 예수처럼 사랑스러운 분이시며 예수처럼 당신을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예수의 모습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마음이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는 하느님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인간의 참 된 모습도 드러내신다.
예수의 모습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이 누구인가를 보여준다.
만나는 사람 하나 하나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 아껴주시고 용서 해 주신 예수-그 분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되어야 할 이상이다. 더우기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와 모든 사람에게 남김없이 내어주신 예수 - 그 분이 인간의 절대적인 완선의 모습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모습을 계시하는 육화의 신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안에 완성된다. 참으로 사랑이 지극이신 예수 안에 하느님의 참모습과 인간의 참모습이 하나로 겹쳐진다.
얼마나 고마운일인가
하느님은 인간이 되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셨고 당신의 목숨을 버리실 만큼 인간을 아껴주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전 인류를 하나로 뭉쳐 한꺼번에 사랑하는것도 아니고 각자에게 조금씩 사랑을 나누어 주는「단체할인」식의 사랑도 아니다. 그 분은 개개인을 전 인류를 사랑 하시는것과 같은 사랑으로 사랑 하시며 각 개인을 전 인류를 아끼시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아껴주신다. 『힘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그분이 먼저 당신의 힘과 마음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그 은혜를 인간은 영원히 갚아드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너무나 큰 빚을 지고있다. 한 평생 매 순간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해도 도저히 다 감사할수 없으며 일생동안 아무 죄도 범하지 않고 지극히 거룩한 삶을 살았다해도 그 분의 은혜를 천부의 일도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한다. 그러기는 커녕 그런일생을 천번 만번 되풀이했다 해도 역시 은혜의 천분의 일도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인간까지 되시어 목숨까지 바치신 우리의 생명- 그 얼마나 귀중한것이겠는가! 너와 나의 삶에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이 걸려있으며 우리의 생명에는 그 분의 목숨이 걸려있다.
이 귀중한 생명을 어찌 열렬히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전부이신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신 한편, 무에 불과한 우리는 하느님께 무 밖에는, 바칠 것이 없다. 그 무를 하느님은 고맙게 받아 주시고 무한한 가치를 붙여 주시고 또 무한한 보답을 주신다니 - 어찌 고마움의 눈물이 넘쳐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얼마나 깨닫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느냐-이것이 인생의 의미이며 하느님의 이 사랑에 얼마나 감동하고 감사하느냐 - 이것이 삶의 보람이다. 우리의 실존을 깊이 흔드는 이 감동 때문에 하느님께 무 밖에는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인가를 바치지 않을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끊임없는 회개
전면적인 사랑에는 전면적인 사랑으로 응답 할 수 밖에 없고, 철저한 자기 양도에는 철저한 자기 양도로 밖에는 갚아드릴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 사랑과 자기 양도의 회개를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까닭이다.
회개는 예수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 감탄하여, 자기의 생각과 언행과 생활의 전부를 그 사랑에 맞추는 행위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것을 그만두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위해 사는(꼬린Ⅱ5 ·15) 행위이다.
회개는 자아에게 탈출하여 예수를 향하는 과월(過越, 빠스카)이며, 예수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사람을 유일 영원의 최고 가치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자신을 속이는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절실히 깨달아 허위의 자신을 벗고 참된 자신을 찾는 행위이다.
이 회개는 한 번 했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이 해 가야한다. 죄를 피할 뿐만 아니라 제 2의 회개, 사랑의 회개, 성화의 회개를 이룩해 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속이거나 합리화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고 하느님께 고집을 부렸는지 - 그것이 하느님께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인지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만약 하느님이 당신의 심정을 우리에게 털어놓으신다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실런지도 모른다. 『이 사람 고집좀 봐! 내가 그렇게까지 해 주었는데 아무 것도 느낄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갚을 줄도 모르다나! 그러기는 커녕 나를 욕하고 배반까지 하다니, 무슨 짓이지!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겠군! 야, 너는 도대체 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내가 꼭 너를 사랑해야 한 줄 아니? 아니면 너에게 사랑할 만한 무슨 매력이나 자격같은것이라도 있는줄 아니? 천만에! 이 건방진 놈 까불지 마!』
성화의 회개
이제 고집을 그만 부려 하느님의 사랑에 굴복하자! 당장 지금부터 회개의 길에 매진한다 해도 너무 늦었을 정도이다. 단 한번의 인생은 하느님의 사랑을 갚기 위해서는 너무 짧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단 한가지 후회하고 아깝게 여기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갚아드리지 못했다는 점 뿐일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완덕에 도달케 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높은 성덕으로 부르시고 잡아끄신다. 끊임없는 회개로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께 가장 죄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회개는 죽을 때까지 계속 해야 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그치지 말아야한다.
이 성화의 회개를 이룩하기 위해「베들레헴」으로 가자!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를 만나러 가자! 거기에서만이 우리는 성인이 되겠다는 숭고한 회개의 동기를 찾아낼 것이다.
주여, 너무나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 자신의 성화를 위해 온갖 힘을 다하겠읍니다. 당신은 우리 전부가 되시고, 우리는 전부 당신의 것이 되어, 우리 자신을 당신의 사랑에 남김 없이 바치겠읍니다. 주여, 제발 뉘우침의 눈물과 자기 성화를 갈망하는 열성의 불을 베풀어 주십시오! <계속>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