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庚戌)년은 우리민족사가 식민지 시대로 전락된「국치의 해」였으니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는 날로 늘어나 교회의 보다 큰 발전을 위해서는 이제까지와 같이 하나의 교구(敎區), 한 분이 주교가 사목하기엔 관할지역이 너무 광대하여 교구를 세분하여 더욱 효과적인 전도 활동을 펴지 않으면 아니 될 상황이었으니 남북 3천리 13도에 2천만 민족이 포교의 대상일 뿐만아니라 만주땅 길림성(吉林省) 간도(間島)에 이민가서 살고있는「백의동포」(白衣同胞=韓國人)신자들까지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에서 돌봐주어야 했던 힘겨운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조선대목구를 차례로 분할하여 새교구를 설정하고 여러 전교단체를 이끌어 들여 웅대한「그리스도 왕국」의 꿈을 펴게 되었다.
1911(辛亥)년 4월 8일 성삐오 10세 교황은 회칙(回勅)을 토하여 조선대목구를 서울과 대구의 두대목구로 병립시켜 충청도 이남의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지방을 새로 설정되는 대구대목구가 관할하도록 하고 대구대목구의 감목(監牧=主敎)으로 폴로리안 드망즈 (F.Deman-ge安世華)신부에게「아드라스(Adrassensis)주교」의 명의(名儀)를 부여하며, 동시에 충청도 이북지방은「밀렌(Milensis)의 명의주교」인 서울의 뮈뗄(A.Mutel閔德孝) 주교가 계속 관리하기로 한다고 반포(頒布)함으로써 한국교회발전의 새 시대를 맞게 되었다.
「남방교구」(南方敎區=大邱代牧區)의 발족인 드망즈(安世華) 주교의 성성식(成聖式)은 삼위일체 대축일인 6월 11일(음력 5월 15일)서울 종현(명동)대성당에서 한국교회 유사 이래 가장 성대하고 장엄한 예식으로 거행되었다.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래 80년동안 8위의 주교가 서품되었으나 제5대 교구장 다블뤼(A.Da·ve luy安敦伊) 주교를 제외한 일곱분은 모두 외국에서 주교 서품을 받고 입국하셨으며 1875년 3월25일(성모영보축일)의 다블뤼(安) 주교서품은 박해 시대였으므로 비밀리에 제4대 교구장 베르뇌(S.Ber·Ineux張敬一) 주교의 집전으로 쁘띠니꼴라(M.Pet·itnicolas朴)신부 · 매스뜨르(J.Mastre李) 신부 · 최도마(崔良業) 신부와 신자 몇 사람이 참석한 초라한 예식이었으나 서울에서 두번째로 거행된 주교 축성식은 온 장안이 축제 분위기가 된 큰 경사였다.
1911년 6월 11일 오전 8시30분부터 시작된 안주교 성성식은 참석자가 많아 전날 입당권(入堂券)을 미리 배부했으며 뮈뗄(閔) 주교의 주례로 만주 봉천(奉天)대목구 소(Couet 蘇) 주교의 공축(共祝)으로 거행 되었으면 서울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관과 총독부 고위관리들도 많이 참석하였다.
「아드라스 주교」대구감목 풀로리안 드망즈 안(安世華) 주교는 1875년 4월 25일 프랑스「알사스」에서 탄생, 성술피스대학「빠리」가톨릭대학·「빠리」국립대학·「빠리」외방전교대학 등에서 수학, 1898년 6월 26일 사제 서품을 받은 다음 그해 10월 8일 한국에 도착하여 1899년 5월 부산본당 주임 · 1900년 9월 서울 용산대신학교 교수 · 1906년 경향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주교로 축성된 학덕(學德)을 겸비한 사도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