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현대 적응을 모뜨로 한 역사적인 제2차「바티깐」공의회가 20년전 1962년 10월11일 개막됐다. 공의회 개막 20년을 맞아 공의회 개막의 배경과 그 결과를 上 · 下로 나누어 간추려 보기로 한다.
20년 전 개막된 제2차「바티깐」공의회는 교회가 교회 자체를 보는 관점에서부터 신자들의 미사 참여에 이르기까지 모든면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교회역사에 있어 공의회로서는 21번째로 열렸던 제2차「바티깐」공의회는 현대적인 통신 매체물 사용한 첫번째 공의회 였다.
따라서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 들간 여러 가지 교리나 또 그 교리 활동을 제안하는 방법에서 빚어지는 충돌등의 보도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신자들 중 많은수는 공의회 이후 기간에 자신들의 불일치를 표명하기도 했다.
1백 34개국에서 2천 8백 60명의 교회 인사가 참석, 교회사에 있어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이며 기념비적인 이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가 교황에 즉위 한 지 2개월도 채 못 돼 갑작스런 영감을 받고 싹트기 시작했다.
교황은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 도메니코 타르디니 추기경과 어느날 현대세계에서의 교회역할을 토의하던 중 공의회소집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1959년 1월25일「로마」에 있는 성(城)외곽의 성바오로 대성전에서 크리스찬일치를 위한 미사를 봉헌한 후 그 자리에 참석한 17명의 추기경들에게 공의회 소집 의사를 처음으로 밝혔었다.
교황 요한23세는 1959년에 발표한 회칙「베드로좌(座)에 대하여」 (앗뻬뜨리 카테드람)와 다른 성명서들에서 공의회의 목적을 밝혔다. 곧 이태리語「아죠르나멘또」란 용어는 교회 생활을 시대의 요구와 방식에 적용하려는 견해를 표현 했다.
교회사에서 가장 광범위했던 이 공의회는 준비하는데만 3년반이 소요됐다.
그래서 1962년 10월 11일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2천 9백 8명의 고위 성직자들 중 2천 5백 40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역사적인 공의회가 개막 됐다.
이 공의회에는 이태리대표가 가장 많았으며 미국이 두번째로, 2백 41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공의회 교부(敎父)들 이외 공식 임명 된 2백 1명의 각계 전문가도 참가했다. 공의회 교부들을 지원하는 신학자들 가운데는 칼 · 라너신부를 비롯한 한스 큉 · 이베스 꽁가르 · 헨리 드루박, 그리고 에드워드 쉴테백 신부등이 포함 돼었다.
10월 11일 제2차「바티깐」공의회 첫번째, 공개 회의에서의 연설을 통해 교황 요한23세는 공의회의 성격을 천명했다. 교황은 말하기를 자신은 현 시대에서 파멸 밖에는 보지않는 사람들과 매일 접촉을 가졌으며 자신은『비록 세상의 종민이 가까왔다고 할지라도 항상 재앙만을 예고하는 이들 파멸의 예언자들』과 뜻을 달리했음을 명백히 밝혔다. 교황은 공의회 교부들에게 잘못을 단죄하지 말고 그 대신 교회 가르침의 타당성을 가르침으로써 현대의 요구에 대응 할 것을 촉구했다. 교황은『신앙의 보증이되는 옛교리의 본질은 한 가지이지만 그것은 주어지는 방법은 또 다른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또 크리스찬의 일치를 위해 노력할 임무를 강조했다. 1962년 10월 11일부터 12월 8일까지 계속 된 공의회 첫 회기동안 공의회 교부들은 전례 계시의 원천 통신매체 그리고 교회의 일치 등에 대해 제안 된 공의회 교서들을 토의했다. 공의회의 주요한 전환점은 계시의 원천에 대한 토의를 벌이는 동안 일어났다.
공의회교리위원회 의장이었던 알프레도 웃타비아니 추기경은 성서가 성전(聖傳)이 하느님 계시의 독립된 두 원천이라는 오랜 입장을 표명하는 개요를 준비하도록 이끌었다.
많은 공의회 교부들은 성서와 성전이 전체를 이룬다는 입장을 취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교회내에 전파되는 것은 두가지 양식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또 그 같은 윤곽은 현대적인 성서연구에 빛을 주지 못하며 특히 성전의 으뜸성을 강조함으로써 크리스찬 일치에 장해 요소가 된다고 주장했다.
6일간의 토의 후 공의회는 이 윤곽에 대해 투표를 실시 했다. 그 결과 많은 수가 그 윤곽을 반대했지만 반대자들은 이 윤곽을 거부 하는데 필요한 3분의2의 표를 얻지 못했다.
그 다음날 교황 요한 23세는 이에 개입해 이 윤곽을 철회하도록 명하고 이 윤곽을 재 작성토록 웃타비아니추기경과 함께 크리스찬 일치국 의장 아우구스띠노 베아 추기경을 공동의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임명했다.
그래서 전례에 대한 윤곽의 완전한 토의를 벌이는데 15일이 걸렸으며 이 것은 다시 수정을 위해 전례위원회에 넘겨졌다.
이중 재안들중 결국 전례헌장에 포함하게 된 내용들은 먼저 미사에서 까논 부분에서 라띤어 사용을 계속하면서 미사의 다른 부분에서는 자국어나 지역언어를 사용하며 둘째 음악이나 미술 또는 조각들이 위엄을 갖추고 경신(敬神)의 목적에 이바지 할 수 있을 때 사용하도록 허가 하는 것 등이었다.
공의회 첫회기의 마지막 6차의 전체회의는 교회에 관한 윤곽을 토의하는데 소요됐다.
리에나트 추기경은 이 윤곽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신비체와 동일 시 하는것을 반대했다. 벨기에「부루게스」의 에밀 드 스멧 주교는 이를 개선적이며 성직자 중심적이고 법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교계가 지도 체제이기보다는 더욱 봉사의 직무라고 말했다. 「밀라노」의 죠반니 몬티니 추기경은 이 윤곽을 신학위원회와 일치 사무국에 의해 개정될것을 천거했다.
그 동안 와병중에 있어온 요한 23세는 12월 7일 공의회를 방문해 교부들에게『여러분의 모임에 참으로 진리에 입각한 사랑이 가득차 있다』면서 교부들을 치하했다.
그 다음날 공의회 제1회기를 마치는 연설에서 교황은 첫 회기동안 공의회 교부들이 때때로 표명한『날카로운 이견』은 교회 내에 존재한『성스러운 자유』의 세계에 대한 건전한 증거였다고 말했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는 서거했으며 그후 18일 만에 몬티니 추기경이 후계자로 선출돼 교황 바오로 6세로 즉위했다.
그 다음날 바오로 6세는 요한 23세의 서거로 자동 중단된 공의회를 계속 할 것이라고 밝히고 5일 후인 9월29일 제2회기가 개막됐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