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탄하자!
「베들레헴」은 허름하고 조그마한 마을이다. 울퉁불퉁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 구유 위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를 뵈옵는다. 그 분을 양 손에 안아 올려 뺨을 맞대고 비빈다.
마음은 느긋해지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안개와 같이 사라진다. 아기 예수를 구유위에 다시 뉘여 놓고 그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 다본다. 귀엽고 가냘픈 얼굴, 추위에 떨며 우는 얼굴에 벌써 십자가의 고통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하느님은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실수 있었을까? 왜 이런 모양이 되셨을까? 절대적인 힘과 권능의 임금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절대적인 무력과 비참의 모습으로 되실 수 밖에 없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 들이기 힘든 신비! 하느님은 너무 하셨다. 너무나도 지나치셨다고 경탄할 수 밖에 없는 신비! 이 아기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가 감탄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이 경탄이야 말로 인간을 하늘까지 올릴 것이다.
어느 누가 말하기를,『인간은 속일 수 없는 목마름을 두 가지 지닌다. 사랑과 감동, 이 욕구를 속이고 있으면 인간은 바싹 말라버린다』고 했다. 우리가 무 의식 속에 갈망해 온 사랑-. 그 것은 바로 예수께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었는가! 또한 우리가 무언지도 모르게 찾아 헤매온 감동-그것은 바로 예수의 모습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인간의 실존을 가득 채우는 사랑이 있다면 그 것은 참으로 예수의 사랑일 것이며, 인간의 그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오는 감동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로 예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일 것이다.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할때 우리의 마음은 느긋해지고 차분해지며 안정된다. 그때야 비로소 죄를 범하지 않으며 자기 성화를 위해 온 힘을 다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어째서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는가? 그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아직 하느님의 너무 나도 큰 사랑을 깨담지 못 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성덕의 길로 매진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좀 더 깨닫고 좀 더 감동할줄안다면 우리는 스스로 죄를 피하고 자기 성화를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일 인간에게 있어 참으로 안타 까운일 - 그 것은 예수께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의 모습에 보이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할 줄 모르는 것은 진정 애석한 일이라 아니할수없다.
받아들이자!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 자신의 사랑이 세상에 들어왔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서 그 사랑(=당신 자신)을 세상에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일생을 걸쳐 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들여 실천에 옮기려고 한다.
씨몬 브에유가 말하듯이「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이미 피조물의 사랑이 아니라 神的인 사랑이요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가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하느님을 사랑할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의미를 버리고 神的인 사랑이 우리 안에 흐르는것을 승락할 뿐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승락」이며「동의」요「받아들임」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아멘」(묵시 3ㆍ14)이요 하느님의 뜻에 대한「피앗」(루까 1ㆍ38)이다.
사도 요한도 자기가『말하는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요한4ㆍ10)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교적 신앙 생활의 전환기는 자기가 하느님을 얼마나 크게 사랑하는가를 깨달았을 때가 아니라, 하느님이 자기를 얼마나 크게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았을 때이다. 그 때야 그리스도인은 자기 멋대로 자기 힘으로, 자기가 노력하는 자기 힘으로, 자기가 노력하는 자기 중심의 영성을 벗어나,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힘으로, 하느님의 활동에 협조하는 하느님 중심의 영성을 살기 시작한다. 그래야 자기 마음의 항구에 평화가 유지되어 사랑과 성화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의 육화이신 아기 예수를 거절치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 분의 사랑에 자신을 송두리째 맡기자! 그 이상 쉬운일 그 이상 감미로운 일, 그리고 그이상 감동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실천하자!
빌라도는 가시관을 머리에 쓰신 예수를 군중 앞에 세워『이 사람을 보시오』하고 외쳤다. (요한19ㆍ5)원문은『Ecce Homo(애째·호모)』즉『보시오, 이것이 인간이다』가 된다. 복음사가 요한은 빌라도의 입을 빌려 예수를 이상적인 인간으로서 선언한다. 채찍을 맞아 피투성이가된 사람, 헐벗은 옷을 입고 비참한 모습이 된 사람 그리고 송두리째 남에게 주고 목숨까지 내어주려는 그 사람을 이상의 인간이라고 한다.
참으로 그렇다. 그 예수의 모습 이야말로 하느님의 참된 모습이며 동시에 모든 인간들이 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자신을 남에게내어 주어야 하느님과 예수를 닮아 인간으로서 풍부해지고 완성된다. 그 반대로 금전 , 재산 , 권력 , 명예 , 지식 등을 탐내고 차지하려고 애쓰면 인간으로서 빈곤해지며 퇴보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차지해야 한다면 그 목적은 오로지 남에게 자신을 보다 내어 주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에 있지 않고 얼마나 철저히 살고, 얼마나 깊이 사랑하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주는 것은 손해이며 차지하는 것은 이익이다」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별 별 죄를 다 짓는다. 이 착각에 빠지면 그만큼 비참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면서도 사람은 욕심을 내어 자신과 남을 더욱 더 불행케 하고 사회와 세계를 한층 어둡게 만든다.
자신과 남을 진실로 행복 하게 하는 길, 사회와 세계를 진정 밝게하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 주신 예수처럼 우리도 자신을 남에게 무조건, 남김없이 내놓는 길이다.
이 길만이 우리를 참 된 인간으로 풍부케 하여 완성시켜 주며 우리 마음에 사라지지 않는 기쁨과 평화를 가져오게 할 것이다.
예수가 세상에 태어나셨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태어나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께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감탄하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실천 하는 그리스도인 안에 예수는 태어나시고 자라나시며 완성되신다. 그 사람 안에 예수는 사신다. 예수의 사랑은 그 삶의 모습에 빛난다.
그 사람은 또 하나의 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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