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용산 대 소신학교에서는 무슨 운동을 했을까? 독자들 가운데에서 궁금히 여길 분이 있을 듯 하여 소개해 보면 축구ㆍ야구ㆍ정구ㆍ발롱ㆍ소구(小球)치기ㆍ제기차기ㆍ윷놀이 등이 있었다.
축구라고 하지만 그게 무슨 축구라 할까? 헝겊을 포개고 포개어 축구공 크기만큼 둥글게 축구장을 만든 뒤 양편으로 편을 갈라서 치고받고 뒹굴고 퉁기다가 천행으로 골인하면 춤을 추거나 헹가래를 치곤했다. 골대 삼아 큰 돌을 양편에 놓고 그 앞을 지키는 골키퍼 복장이 요란했다. 선수들도 프랑스 해군복처럼 누렇고 시퍼런 바지저고리에 가죽 혁대를 질끈 동여매고 용산 바닥이 더 나가라 날뛰었던 것이다.
교정의 느티나무가 원수였다. 롱슛을 한다는 게 그 나무 둥지에 가 부딪혀 구경꾼들의 머리로 가슴으로 날아갔다. 선수도 롱슛을 하느라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졌다.
축구 선수들 발을 보면 너덜너덜한 버선에 다 떨어진 구두나 미투리를 신어 그 모양이 가관이었다. 사진이 없는 게 오늘 와서는 한이로다.
야구는 매주 목요일마다 동작리 별장에 산보 가면 했다. 야구공이나 방망이를 구하느라 별장 뒷산의 생나무를 괴롭혀야 했다.
알맞은 나무를 가져 오면 시간 날 때마다 칼이나 낫으로 야구 배트를 그럴듯하게 다듬었고 야구공은 나무를 토막 내어 동그랗게 만들었다. 효창공원에서 일본 학생들이 야구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생나무로 만든 야구공은 나무가 마르면 금이 가고 터지고 마침내는 빼개 지고 만다. 이것을 부상병 붕대 감아 주듯 노끈이나 헝겊으로 뱅뱅 둘러서 야구를 즐겼다.
야구를 할 때도 마당 한가운데 버티고선 느티나무 두 놈이 원수로다. 날아가던 공이 나무 위로 올라가면 함흥차사였다. 무성한 느티나무 가지 속으로 공을 찾아 이리저리 더듬다 보면 얼결에 야구방망이에 맞아 코피 쏟는 학생에, 다음날 이마에 둥그런 혹이 불쑥 나와 놀림감이 되는 학생도 나왔다. 그래도 즐거웠다.
야구방망이도 야구공처럼 생나무로 만드니 얼마 가지 않아 터지고 구부러지곤 했다. 아예 여벌로 여러 개를 만든다고 톱으로 생나무를 잘라 오기도 했다.
그런데 회안한 것은 그 호랑이 같은 교장 선생님도 웃기만 하시는 것이었다. 자식 사랑하듯 우리들을 끔찍이 사랑하셨기에…
야구를 하든 축구를 하든 언제나 말썽을 부리던 느티나무는 어느 날 운동장 한복판에서 뽑히고 말았다.
그 느티나무는 1896년 4월 26일 한국 내에서 최초로 신부가 된 강도영(姜道永) 마르꼬 신부님이 구덩이를 메꾸는 숱한 고생 끝에 매물 작업을 마치고 운동장이 완성되자 후배들에게 忍苦속에 기쁨과 희망을 길러 가라고 교훈 삼아 기념식수를 한 것이었다. 프랑스「삐낭」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신부가 됐던 강 신부가 심은 나무들은 모두 열 그루로, 금이야 옥이야 가꾸고 아껴 내 아름으로 거의 반아름이 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 것들이 운동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기에 파 내버린 심 신부님의 깊은 사랑도 잊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정구를 치느라 네트를 걸 기둥감도 역시 동작리 산에서 잘라 왔다.
양편에 이 나무들을 세우고 나면 네트를 만들었다. 헝겊과 노끈을 있는 대로 모아 꼬은 뒤 그물을 만들어 쳤다. 내가 보기에도 근사한 것이었다.
이런 일들은 키가 멀쑥하고 호리호리한 윗반 학생들이 주둥이 됐다. 아무 말 없이 나무를 깎고 노끈을 꼬면서 씩 웃었던 그들 중 한분은 지금 83세 노환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노 대주교님이시다.
아마도 천주님은 그때부터 그분을 대 주교감으로 깎고 다듬고 하셨는가 보다.
밭 통이란 손으로 벽돌 벽에 공을 짝지어 치는 운동이다. 공을 아무데나 잘못 치면 유리창이 짤가당 희생이 됐다.
깨뜨린 학생은 운동장 정리하는 벌을 반드시 식당에서 만중이 보는 앞에서 무릎 꿇고 맨밥 먹기가 일쑤였다.
소구치기란 소의 구슬치기로, 땅을 빼앗는 놀이였다. 옷이나 손이야 더러워지건 말건 맨땅에 엎드리듯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장난으로, 그때는 지금같이 유리구슬이 없어서 돌을 시멘트 바닥에 굴려 가면서 갈아 구슬을 만들었다. 돌 구슬 한개 만드는 데 1주일이 걸렸다. 꼬마들은 꼬마들끼리, 큰 사람은 큰 사람끼리 모여서 신나게 제기를 차며 놀기도 했다. 너무 신이 나 수업 종소리도 못 듣고 늦게 들어가다가 식당 벌 서는 일도 있었다.
본디 정월에만 하던 윷놀이를 1년 내내 했다. 중국에서 들어온 정월 놀이인 윷놀이를 정월 보름 넘어서서 놀면「백정윷」이라 했는데 우리 신학생들은 정월이고 섣달이고 상관없었다. 백정이 돼도 쫓다는 것이다.
대 소신 학생치고 백정 아닌 이가 없게 됐다. 1년 내내 윷놀이를 했으니 말이다. 멀쩡한 윷 백정들이 신부가 되고 대주교님이 됐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