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 살 되던 1917년부터 신부가 된 1932년 여름까지 물난리ㆍ가뭄 소동에 조용하 날이 없었다. 물꼬 싸움에 낮ㆍ호미ㆍ삽 싸움이 나서 죽고 죽이고 상하는 소동이 매년 벌어졌다.
논바닥이 소 혀처럼 쩍쩍 갈라졌고, 중복을 넘기면 안 되는 모내기도 어느 핸가는 말복을 바라보며 한 적도 있다. 이왕 기른 모가 아까워 이판사판으로 모를 냈는데 기껏 자란다는 게 쥐꼬리만큼. 이삭 팰 때가 되자 질세라 그 가냘픈 모에서 꽃이 피고 벼이삭이 쏟아 나왔지만 그것은 폐농 거리 밖에 안됐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버리니 말이다.
여름방학에 집에 가면 비 걱정 물 걱정 아니 해본 적 없고, 그 꼴을 보고 서울에 오면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나만이 아니어서 모든 이의 고개가 힘이 없이 건들건들, 얼굴에는 수심한 가득하고, 마음은 화닥불을 놓은 것 같았다.
『유다 백성은 모두 이 성문 저 성문에 모여 풀이 죽어 통곡하고 있다…온 나라 어디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갈라지니 농부들은 기가 막혀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쉴 뿐. 들 사슴은 새끼에게 뜯길 풀이 없어 날아서 그대고 내버리는 형편이요 노새들은 언덕 위에 올라서서 여우처럼 숨이 가빠 헐떡이며 뜯을 풀이 없어 눈이 가 흐려졌다』(예례미마 14ㆍ1~6)
어쩌면 예레미아 선지자의 예언이 이 땅에 그렇게 들어맞을 수가 있었으랴.
80%가 농민인 이 땅에 「農者天下之大本」이란 가치를 내 걸고 어른ㆍ아이ㆍ남자ㆍ여자 모두모두 밭고랑에 목을 걸고 죽자 사자 바동거리던 그 시대상은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나 쌀 됫박이나 거둬 부모 봉양하고 자식새끼 배 좀 불려 보려면 총독부 일본인이 싹싹 거둬 갔고 만주에서 좁쌀 끌어다가 배급을 주거나 곡식 시장에서 팔게 했다.
숟갈로 떠서 후우 불면 좁쌀 알갱이가 하나 둘 날라리 춤을 추며 방바닥에 눈 내리듯 했다. 그것뿐이랴. 일제 말년에는 콩깨묵을 배급, 사람들이 그것을 먹고 설사를 했고 어린 것들은 그냥 고스란히 내어놓았다.
신학생들은 공부는 세었고 먹을 것은 별로 좋지 못했다. 학생들은 뒷동산에 불개미처럼 도토리나무에 올라가 위에서는 나무를 흔들고 알서는 주섬주섬 모아 시커먼 도토리 밥을 진주 성찬으로 알고 먹었다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게 먹은데 까지는 좋았다. 취침 시간이면 여기저기서『아이구, 어머니! 성모 마리아! 나 죽겠네.』온통 신학교가 발끈 뒤집힌다.
도토리는 며칠씩 울궈 놓았다가 묵을 하든 밥을 짓든 해야 하는데 생 놈을 가지고 그대로 밥을 하니 아릿한 독소가 빠지지 않아 설사 구토에 사경을 헤매는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기름이 줄줄 흐르는 여주 쌀에 금싸라기 같은 김포 쌀로 배를 두들길 때에 말이다.
천주님은 이 가엾은 농민들을 위해 그래도 아쉬운 것이 비이니 잘 빌어 주자하여 근 2천년을 내려오면서 예수승천前 월ㆍ화ㆍ수ㆍ요일 3일간『천주님은 이 불쌍한 농사짓는 백성에게 우로지책을 내려 주십사.』하고 특별 기도를 바치도록 하셨다. 이 기도를 「三天기도」라고 한다.
「3일 동안 천주님께 비는 날」이란 뜻이다.
용산 신학교에서도 그 사흘간은 꼭두새벽에 교장 신부님 이하 모든 교수 신부들과 학생이 일심전력으로 「비를 적지 적소에 내려 주십사.」하고 빌었다. 모든 성인들의 호칭기도를 쾌청한 목소리로 뒷동산ㆍ운동장ㆍ성당 주위ㆍ미사비엘 성모 동굴을 싸고돌면서 그 긴 삼천기도를 바쳤다. 제각기 시골 자기 집 처지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빌었다.
그런데 우물쭈물하다가 기도에 늦은 학생은 가슴이 두근두근 성당 모퉁이에도 숨고 그중 용감한 학생은 늦어도 이판사판이다 하고 기도 행렬에 뛰어들었다. 그런 학생은 아침 식사 때 식당 벌이 안성맞춤이다. 전에도 말한바 있지만 식당 벌이란 교수 신부님을 식탁과 학생들 식탁 중앙에 무릎을 꿀고 앉아 맨밥을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벌이다. 이 벌을 세 번 서면 인정사정없이 보따리를 싸야 했다.
나는 요행수로 종지기라는 핑계로 좀 늦게 행렬에 끼어들어도 교장 신부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못 본체 하신다. 종덕을 본 것이 몇 번인지 헤아릴 수가 없다.
어디 가든지 종만 보면 그때가 생각나고 한 번 만져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 아직도 내 핏줄을 타고 흐른다. 전기가 통하듯 찌르르 한다.
『종소리는 천국에 가장 가까운 음악이다』(템)는 말이 언제나 삼천기도에 늦은 나를 구해 주었다. 이 삼천기도는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후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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