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6월 26일「조선 남방교구」(大邱代牧區)의 첫 주교로 부임한 풀로리안ㆍ드망즈(安世華) 주교는 김 야고보(金永垠) 복사(秘書)를 대동하고 호남(湖南)과 제주(濟州)의 교회들을 사목 순시(司牧巡視) 하기 위해 9월 11일 고된 여행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당시의 우리나라 교통 사정은 경인(京仁) 경부(京釜) 경의(京義)선 철도는 개통되었지만 호남선(大田-木浦)은 아직 대전에서 연산(連山)까지만 일부 구간이 운행되고 있을 뿐이며, 도로 사정과 자동차의 교통편도 없었던 때이므로 전라남북도의 9개 본당과 제주도의 2개 본당을 순방하는데 2개월이(60여 일)소요된, 고생 많은 여행이었다.
9월 11일 오후 1시 대구역을 떠난 경부선 상행 열차는 오후 4시30분 대전에 도착했는데 대전역에는 고산(高山)지방 신자들이 마중 나와 주교를 환영하였으나 이때 대전 시내에는 아직 본당이 없었으므로 미리 예약된 어떤 여관(旅館)으로 안내되어 이날 밤은 여관에서 쉬게 되었다.
9월 12일, 이날은 아침부터 많은 비로 일찍 출발을 못하고 12시50분 대전역을 떠나는 호남선 열차로 연산에 이르러 하차하였는데 연산역에서도 많은 시자들이 마중 나와 주교의 내림(來臨)을 환영하였고 주교께서 타실 말(馬)도 대기 중이었으므로 주교는 말을 타시고 마중 나온 신자들은 보행(步行)으로 호남에서 맨 처음 세워진(1895년建立)「고산 되재」(全州都 雲仙面 升峙里)성당으로 향해 떠나게 되었다. 비가 내리는 중에 연산서「되재」까지의 50리길을 걸어 일행이 성당에 다다를 무렵 비는 멎었으나 날은 저물어 그곳 신자들은 횃불과 등불을 들고 나와 열렬히 주교를 맞이하였다.
「고산되재」본당은 신교 자유의 여명이(黎明期)였던 1893년에 설정된 지방 전교의 중심지로서 전주(全州大成洞)와 금구(金溝-金堤)「배재」(梨峴)와 함께 호남 교회 발상이 3대 원류(源流)중 하나인 곳이다.
「되재」(升峙)본당은 뽈ㆍ비르모(P.villemot 萬一模) 신부가 첫 본당 신부로 5년간 본당의 기틀을 마련한 뒤를 이어 1898년미알롱(A.Mialon 孟錫浩)신부가 제2대 본당신부로 8년간 사목하다가 1905년 정읍(井邑)으로 전임되고 제3대 본당신부로 베르몽(J.Bermond 睦世榮) 신부가 부임하자 이듬해인 1906년「신성(晨星)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기관까지 갖춘 당시의 큰 본당이다.
1895년 성당 축성식 때 뮈뗄(閔德孝) 주교의 내림 이래 16년 만에 주교의 순방을 맞은 이 지방 신자들의 환영은 성대하였고 지방으로 서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1세기 동안 6~7차나 혹독한 교난(敎難)이 거듭되어 신자들은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읍내나 평야 지대에 살지 못하고 피난 겸 산협(山峽)지대로 온거(隱居)하였기 때문에 두메산골 벽촌에 새워진「되재」성당은 순교자들의 후손들이 이룩한 삶과 믿음이 공동체의 중심이었고 또한 우리나라 개화기(開化期)에 있어 국민 계몽과 개화의 기 수역할도 했다.
안 주교는 9월 13~14일을「되재」본당에 유하면서 1천여 명에게 성사(견진)를 주고 9월 15일「나바위」본당으로 향해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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