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계 관광, 촌닭 관청에 잡혀 온 꼴이 된 내게 신학교에 들어간 지 3개월 열하루 되는 날이 다가왔다.
이날이 바로 성탄 전야제를 맞는 날이다. 그때에는 눈이 왔다 하면 보통 정강이가 푹푹 빠질 지경이었다.
눈이 오자 신학생들은 사발등을 만든다 했다. 흰 종이를 삼각으로 접고 그 속에 눈을 한 삽씩 떠 넣고 그 눈 속에 양초 하나씩 꽂고 불을 켜면 흰 눈에 반사되며 휘황찬란한 줄 등불이 켜진다. 정문에서 교정까지 대ㆍ소신학교를 빙 둘러 땅에는 다발 등을 켜고, 정문에서 모교 건물까지 죽 늘어선 포플라 나무에 수박등을 줄줄이 늘였고, 모든 건물에도 오색찬란한 줄등으로 장식하니 보기만 해도 공연히 이 촌놈이 신바람이 났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지금 생각해 보니 우습기만 하다.
대신학교 교정에는 마당을 5~6cm씩 파서 NOEL(성탄)의 네 글자를 새기고, 여러 날부터 성당에서 쓰다 남은 초 토막과 초 찌꺼기를 녹인 촛물을 그 흠을 따라 찰랑찰랑 할 때까지 부어넣었다. 성탄전야가 되면 심지를 글자 모양대로 박고 불을 당긴다. 성성하게 타오르던 그 불꽃. 4천년 동안 선조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던 마음이 불꽃 속에서 오늘도 타오르는 듯 하여 어린 마음에 흐뭇하고 신기했다.
지금도 성탄이 돌아오면 그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내 가슴 속에…
밤 열시경이 되면 소ㆍ대신학교 학생 전원이 소신학교 교정에 집합된다. 각각 시각 종이 등을 들고『구유에 누워 계시니…』성가들을 읊으며 소신학교 건물 전체를 빙빙 돌고, 다음에는 높고 낮은 층계를 오르내리며 제등행렬을 한다.
행렬하면서 여기저기 바라보니 대신학교 3층 유리창에 줄줄이 달린 수박등이 오색찬란하게 켜있고「4천년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는 빨리 오소서」의 멜로디가 고요한 밤에 메아리치니 불야성을 이룬 듯 했다.
아랫 동안 사람들은 제각기 뛰쳐나와 이 장관에 환호성을 올렸고 꼬마들은 우리 축에 끼기도 했다. 그중 이 삼복 요한ㆍ조 베드로 백록은 성가를 곧잘 불렀는데 후일 신부가 되어 이 신부는 은퇴 휴양 중이고 조 신부는 현재 서울 상도동 본당 신부로 활동 중이니 그때 성탄전야에서 童心으로 참석한 것을 아기 예수님이 잘 봐 두셨던 모양이다.
행렬은 교정의 NOEL이라고 새긴 글자의 휘황찬란한 불덩이를 빙빙 돌고 나서 끝났다. 약 한 시간 반에 걸친 기막힌 장관의 제등행렬이었다.
행렬이 다 끝난 다음에는 대신학교 큰 홀로 들어간다. 어느 결에 그렇게 장식했는지 나는 어린 마음에 황홀해지고 가슴이 뿌듯하였다.
온갖 장난감ㆍ상본ㆍ성물ㆍ인형ㆍ학용품 등이 중앙에 세운 큰 크리스마스트리에 앵두 달리듯 주렁주렁 달렸다. 그 옆에는 조그마한 초막에 아기 예수가 바르르 떨며 응애응애 우시는 듯, 그 옆에 무릎 꿇은 성모마리아ㆍ성 요셉이 어린 마음에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무서운 교장 신부, 순직한 담임 교수인 차 신부, 툭하면 꾸지람 잘하시던 김 알렉시오(金聖學) 신부님은 물론 부제반 우리 윗반 학생들은 신입생이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를 있는 대로 불렀다. 합창ㆍ중창ㆍ독창 등은 추위에 떠는 아기 예수를 훈훈하게 해주었다.
끝으로 제비를 뽑아 선물을 선사받는데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거룩하고 신기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제비를 뽑자 큰 은고상이 나왔다. 얼마나 기뻤는지 형언할 길이 없었다.
이 고상은 내게『지금부터 십자가의 길을 떠나고 신부가 되면 몇 번이고 못 박히고 수없이 저 골고타이 언덕을 오르내릴 터이니 이 십자가를 네 인생의 이정표로 삼아라.』하는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십자가를 꼭 지닌 채 사제 서품을 받았고 부임지마다 품고 다녔는데 그 십자가는 6ㆍ25때 대전에서 그만 아깝게 파괴되고 말았다.
십자가를 선물 받은 것 외에도 다윗의 시편 1백33장『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하데 사는 일…』처럼 성탄 전야제의 추억은 사제 생활 반백년 동안 내 생활을 이끌어 주었다.
성탄 전야제를 이렇게 성대하게 지내도록 교장 신부님이 배려하신 것은 이다음에 사목 생활 하면서 신자들에게 성탄 축일을 성대하게 지내도록 인식시켜 주라는 그윽한 뜻에서였다.
사람은 기쁠 때를 맞으면 누구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사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성탄 때 가장 냉담자가 많이 돌아온다.
60년ㆍ50년ㆍ30년씩 케케묵은 오래된 냉담자가 베드로의 그물에 큰 고기가 걸리듯 돌아오는 때라는 것은 50년을 회고할 때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들이 어린 시절의 성대한 성탄 축일을 기억하면서 교회로 돌아오게끔 해주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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