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육체적ㆍ정신적 고통을 경험한다. 또한 이웃에게 고통을 끼치지 않고 성장한 사람은 없을 정도로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는 항상 누구인가의 봉사적 희생과 고통이 밑거름이 되고 있다. 보상 없는 희생과 남이 알아주지 않는 노력을 쏟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효도하는 이유도 이들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희생과 봉사는 무능한 사람에게는 필연적인 의무이다. 따라서 이 권리가 박탈되었을 때 인간사회는 어떤 모양으로는 보복을 당하게 된다. 부모의 정과 희생을 맛보지 않고 사람이 어떻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 죽음 앞에서「왜?」라고 질문하기 전에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
비인간적 대우를 받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하느님께 항의한다.
예언자 예레미아는『만군이 야훼여, 사람의 뱃속과 심장을 달아보시는 재판관이시여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이 무리에게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그것을 이 눈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예레11ㆍ20)라며 자신의 억울한 고통에 대해 하소연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 보복의 절규는 12장1절과 15장 10절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야훼여 주께서는 저를 아시지 않습니까? 저를 잊지 마시고 도와주십시오.』(예레15ㆍ15)라는 간청으로 바뀐다.
이런 상황이 어찌 2천5백 년 전의 사건일 뿐이겠는가. 현재 우리의 사회에서도 남의 부도를 막아 주다 파산하고 친구로서 보증 섰다가 사기 당하며 기본 권리인 종교 직업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한결같이 정의의 하느님을 침묵 중에 계신다. 인간이 불행과 고통을 인과관계나 업보에만 매달려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는『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힘 빠지는 넋두리만 남을 뿐이다.
그러나 복음은 「고통은 왜?」「죽음은 왜?」라는 인간 실존이 역사적 질문에 대해 응답하고 있다.
義人 예수가 돌아가신 골고타 언덕에는 3개의 십자가가 있다. (루까23, 33, 44)
첫째로 왼편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예수를 모욕하면서『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요?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라고 말한다. 이 사람의 말은 예수를 죽이려던 자들이 십자가 밑에서『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라고 놀려대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당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혁명 당원들이 살인자나 강도로 몰려 처형당하던 상황을 참조해 볼 때 왼편 죄수의 말은 당연한 요청이고 지혜로운 제안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무산대중을 위한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같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공산주의나 보다 나는 시설 투자와 경쟁력 확보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들의 기본 권익까지 억압하는 자본주의의 부조리에서 현실과 미래지향의 차이와 비약의 맹점을 볼 수 있다.
결국 왼쪽 십자가의 죄수는 부분적 진리에 의존했기 때문에 절망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둘째로 오른편 십자가의 죄수는『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가 한 짓을 봐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고 꾸짖고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차원이 열림을 본다. 인과응보에 순용하여 영원한 세계에 대한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오른편의 죄수가 왼편의 죄수처럼 살인ㆍ약탕을 통한 독립운동을 했다만 어떤 최후를 맞을 것인지 알았겠지만 예수께 죽음을 통해 기대되는 새세상과의 화해와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인간의 한계성은 의인 예수의 죽음과 연관을 갖게됨으로써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중앙에 서 있는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죽음이 지닌 의미의 양면성을 계시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들은 사람들의 메시아에 대한 물이해, 지도층과 권력층의 질투, 증오, 책임 회피와 책임전가, 현상유지를 위한 아부, 측근자들의 배신 등이다. 이와 같은 고통과 절망적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르꼬15ㆍ34)
아무런 기대와 희망도 없고 원한과 증오ㆍ비웃으며 무리에 둘러싸여 죽어 가는 예수의 상황은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신학자들은 이와 같은 예의 죽음에서 지옥을 보려 한다. 그래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고백 안에는 예수께서「지옥에 내리시어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포함시킨 것이다.
반면에 이 예수의 고통과 죽음에서 더욱 길고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거절된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를 죽인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희생과 봉사를 모르고 이기적 생활만을 하는 인간사회이다. 따라서 거절된 사랑에 대한 응답인 고통은 이기적인 사회를 거부하고 희생과 봉사를 자원한 사람에게 따르는 결과라고 하겠다.
둘째로 보다 큰 사랑의 표지이다. 일반적으로 부모나 의사, 공직자들의 고통과 희생은 사회질서나 질병의 쾌유ㆍ인간적 성장을 위해 절대로 요청되는 일이다. 인간 행복의 조건은 이웃의 희생과 봉사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고통은 사랑의 요청이다. 인간사회에 고통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고통을 자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통은 왜?」라는 향의보다. 내 고통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라고 여길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즉 의인의 고통의 의미를 알아듣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을 때 죽으실 필요가 없던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셨다. 꼬린토후서 5장21절에서는 죄 없는 이가 죄의 용서를 위해 희생되신 진리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오늘의 역사 안에서도 예수와 같이 불의하고 부당하게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희생적 사랑 때문에 우리 믿음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극복한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시기에 사랑의 징표로서 어려운 것을 부탁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베전 4ㆍ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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