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을 넘기면서 병마와 싸우는 老대주교. 약간 야인 듯 한 그 모습 속엔 여전히 최초의 한국인 주교다운 기풍이 서려 있다. 지난 81회 생신을 기해 자신의 유품으로 남겨질 각종 자료들을 「한국 교회사 연구소」와「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각각 넘겨주도록 한 당당한 결단으로 사람들은 또 한 번 虛期南 대주교의 「큰마음」을 가슴속 깊이 되새겼다. 역시 그는 오랜 세월을 공인으로 살아오면서 적절한 그때를 현명하게 선택해 온 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보는 최초 한국인 주교로서 이 땅의 영욕을 함께했던 虛 대주교가 65년이 성직 생활 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자료 중 일부를 공개, 격동기 아니라 이교회가 숨 가쁘게 걸어온 역사의 발자취를 함께 더듬어 보다.
『주교님! 저를 신품 학당에 보내 주세요. 저는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1913년 여름, 황해도 지방「浦內본당」을 방문 중인 뮈델 민 주교와 주임 부이수 신부(孫以變ㆍ빠리 외방 전교회)가 견진성사를 마친 후 조용히 담소하고 있는 방에 갑자기 한 소년이 쥐어 들었다. 당황한 손 신부가「당장 나가라」고 호령을 해도 소년은 공짜도 하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소년의 표정과 태도를 지켜보던 민 주교는 소년에게 신품 학당에 보내 줄 것을 약속했다. 바로 이듬해인 1914년에…
겁도 없이「높고」「지엄하기 만한 주교님 앞에 나이가 신품 학당에 보내 달라고 떼(?)를 쓴 소년은 13살의 노기남 소년이었다. 마음속 깊이 신부가 되리라고 결심하고 그 결심을 지켜 실행에 옮겼던 노 대주교는 결코「浦內본당」주임 손이선 신부를 잊지 못하고 있다.
엄격한 문답 찰고와 교훈으로 무섭기만 한 손 신부였으나 높은 신덕을 바탕으로 한 사제로서의 훌륭한 삶은 어린 소년에게 깊은 감명과 함께 사제의 길에 대한 갈망을 일으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代를 물려 온 깊은 신심과 그 가정 속에서 신앙을 키워 온 노 대주교가 사제성소를 꿈 꾸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지만 혼란 중에 있던 당시의 국제 정세와 나라 사정은 어린 소년의 소박한 꿈을 언제라도 빼앗아 갈 수 있었던 불안한 상황이었다.
혼란과 변화의 와중에서「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 소년의 신품 학당 입학은 무기 연기 되었다. 부모들의 실망은 물론 소년의 낙심은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 소년이 3년간이나 그 뜻을 변치 않고 신부될 결심을 지켜온 것은 손 신부의 거룩한 표양과 신심 생활의 지도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무서운 신부로 통했던 손 신부 였지만 신심 깊은 생활과 덕망 높은 인품, 그리고 뜨거움과 경건함이 깃든 참 사제의 표양은 소년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했던 것이었다.
『나도 저분과 같은 신부가 되었으면…』길고 지루하기만 했던 3년에는 손 신부의 표양은 소년이 사제가 되고 주교ㆍ대주교를 거친 70년 동안 변함없이 지켜 준 하나의 채찍이 되었다.
노 대주교가 간직하고 있는 각종 자료 가운데 노랗게 변색되었으나 별로 손상되지 않고 소중히 보관되어 있는「孫以變 신부의 護照」는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6ㆍ25 정부 수립 등 거듭된 혼란 속에서도 손 신부의 護照(여권)를 소중히 간직해 온 노 대주교는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손 신부를 잊지 않고 사랑해 왔던 것이다.
손 신부가 노기남 소년을 신학교에 가도록 보이지 않는 힘이 됐다는 또 하나의 사실은 뮈멜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14년 여름, 손 신부는 민 주교에게 보낸 편지(보고서)에서 신학교를 보내 달라고 뛰어 들었던 노기남 소년의 얘기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뮈뗄 문서」로 보관돼 있는 이 편지는 신학교를 가기로 결심했던 그 소년이, 그 꿈이 연기된 지금도 얼마나 열심히 원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적고 있다.
손 신부는 편지에게 소년은 부모들이 그에게『네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 신학교로 가려한다.』고 만류하지『그것은 부모님들이 하느님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이며 모든 계명 중에 으뜸은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사연을 소상히 적고 갸륵한 소년의 변함없는 원의를 받아 주시도록 청원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손 신부의 배려로 노기남 소년은 1917년 드디어 신학당에 입학하게 됐다. 사제에의 길을 꿈 꾼 지는 5년여, 뜨겁게 결심한 지는 3년의 세월이 지난 때였다. 노 대주교는 부제 때 포내 본당을 떠나 하우현 본당에서 사목하던 손 신부를 찾아 방학 기간을 보내곤 해 손 신부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1890년 이 땅을 밟은 손 신부는 1949년 7월 14일 77세를 일기로 선종, 60여 년간 뜨거운 정열로 사제의 길을 걸어온 이 땅에 묻혔다. 「부이수ㆍ孫신부의 護照」, 그것은 분명 노 대주교를 지켜 온 하나의 수호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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