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주년 기념사업 위원회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중 1차로 선정된 시복 후보자 22명에 대한 조서 집필을 지난해 12월 27일자로 관계 전문 학자들에게 의뢰, 시복 후보자들의 조서 시안을 마련 중에 있다. 이에 본보는 조서 시안을 통해 시복 후보자들의 행적과 신앙을 요약, 몇 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편집자註>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성조인 광암 이벽 (세자 요한) 은 1754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윗두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초명 했던 이벽은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와 있던 서학에 호기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 그 심오한 뜻을 음미하면서 신앙의 마음이 싹텄다.
1780년 정월 지금 이벽 묘 자리가 위치한 천진암에서 학자 권철신을 주축으로 정약전 김원성ㆍ권상학ㆍ이승훈ㆍ정약종ㆍ이조억ㆍ정약용 등이 모여 강학회를 개최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이벽은 그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싹을 돋아나게 했다. 그는 이때 천주 공경가 등을 짓기도 했다.
이벽의 수차례에 걸친 노력 끝에「北京」에 파견된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영명으로 세례를 받고 성서ㆍ성물 구입 등 부임된 사명 완수 후 1784년 귀국하자 이벽은 이 서적들을 통해 학문의 갈증보다 절실했던 종교의 갈증을 해소하면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 한국 천구 교회 창립의 기초를 다져 갔다.
그런데 1785년 을사년 첫 박해가 시작됐다.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을 때 추조 금리들이 들어 닥쳐 집안을 수색하고 성서ㆍ성물을 몰수하는가 하면 중인 계급인 김범우를 체포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양반 집안 신분이라 함부로 다루기가 곤란 하자 같은 양반들의 문중 세력을 이용했다.
이벽의 경주 이씨 문중 회의는 체면과 위신을 내세워 이벽이 천주학을 그만두도록 아버지 이천주학을 그만두도록 아버지 이부만을 통해 강요했고 3개월간 소란스럽다가 이벽이 열병으로 다 죽어 간다는 말로 무마됐다
집에 갇힌 채 답답한 나날을 보내던 이벽은 마지막에 가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다 탈진, 1785년 6월14일 밤 12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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