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한국 신부들과 신학생들의 라틴어 실력은 아시아 전 지역 성직 계급에서 가히 자타가 공인하는 바였다.
이 실력을 더 빛내기 위해 30여 년 간 대신학교 교장직을 맡으신 진 베드로 신부님은 순 라틴어로 월간 교지「따벨라」를 발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걷히고 군대에 동원됐던 유 에밀리 드브렛(Devred)교수신 부가 예편돼 1918년 가을 용산 신학교로 돌아오셨다. 이때부터 진 교장 신부님이「따벨라」지를 발간케 됐던 것이다.
처음에는 인쇄는 엄두도 못 내고 매달 유 신부님이 등사 용지에다 골필로 활자만큼 선명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그 많은 원고를 라틴어로 써서 친히 등사판에 걸어 인쇄하신 후 제본까지 하여 배부해 주셨다. 투고는 주로 진 교장 신부님 단독 작업이었다.
그러나 유 신부님 혼자 힘으로는 너무 힘든 일이었고 1920년 성탄 직전에 유 신부님이 민동 주교관으로 가시게 돼 교지 발간이 곤란해지자 사람으로 치면 환갑 진갑 다 지났을 헐어 빠진 활판 기계를 구입해 대신학교 건물 아래 층에 설치했다. 그게 바로 교장 신부님 침실 바로 아래였다.
나의 소신학교 은사인 유 신부님이 주교관으로 가신 뒤인 1920년 연말부터 대신 학생들이 직접 인쇄공이 되었다.
문선ㆍ조판ㆍ동판정리ㆍ초교ㆍ재교까지 그들이 해내고 마지막 교정은 뿔리 심 신부님이 봐주셨다.
매일 양덕환 안드레아 부제님이 마지막 교정 거리를 들고 짤막한 몸매에 생글생글 웃어 가며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심 신부님께 끌 교정을 받으로 소신학교로 내려왔다가는 시무룩해 가지고 종잇장을 들고 대신학교로 올라가는 것을 교실 창밖으로 바라보며 『옳지. 또 제 부제님이 된서리를 맞으셨구나』하고 동정해 마지않았다.
마지막 교정이 끝나면 덜커덩거리며 활판기를 돌리는데, 오후데 꼭 씨에스따(낮잠)를 하시는 교장 신부님 잠을 깨우기 일쑤였다. 잠을 깬 교장 신부님은 주무시다 말고 뚜벅뚜벅 내려와 천둥벼락을 치신다. 누가 바로 자기 침실 밑 방에 인쇄기를 설치하랬나? 뻔히 그럴 줄 아시면서도…하지만 누구나 선잠을 깨우면 그렇게 할 것이다.
한번은 박일규 안드레아 차부제님이 인쇄기가 열 말을 듣지 않자 방망이로 탕탕 두들겨 댔다. 얼마 동안을『이 경을 칠놈의 활판기 봤나! 마귀가 붙었나? 속상해 못해 먹겠네!』하고 두들겨 대는데 바로 윗 층에서 곤히 낮잠을 주무시던 교장 신부님이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박 차부제님은 안성장이 깨지나 평택장이 깨지나 하면서 계속 두들겨 댔던 것이다.
『옳지, 옳지. 너 잘한다. 날 때리는 거냐. 인쇄기를 때리는 거냐. 잘한다, 잘해! 망치 로 날 두들겨 댄 공로로 이번에 부제품 그만 두지 뭐!』하고 교장 신부님은 탁 닫고 나가셨다.
인쇄방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인쇄기를 잘못 다루면 품이 떨어지는 판국이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장난꾸러기 양기섭 베드로가 下品을 받아 올라갈 때였는데 날마다 지성으로 인쇄기에 매달렸다. 혼자서 찍어내는 일을 도맡아서는.
강의 때마다 한사람씩 일으켜서 구두시험을 하고 새 강의로 들어가는 교장 신부님은 양기섭이 공부를 아주 안 해 물음에 끙끙대고 더듬거리면『너야 인쇄하느라고 공부를 못했겠지』하고 그냥 앉히셨다. 그다음 기회에『필경 저 녀석이 품이 떨어지지』해도 영락없이 붙어 있었다. 양기섭은 정월 초하룻날 세배 절을 백번 인쇄기에 해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는 인쇄기가 살려줬지, 인쇄기 아니면 그 심술궂은 꼴에 품이 몇 번이고 떨어질 뻔 했던 것이다. 자신도 이 말에 인정을 했다.
인쇄가 다 끝나면 조판한 것을 밖에 내놓고 양잿물로 죄다 닦아내야 하는데 냄새가 코를 찌르고 손가락ㆍ손바닥ㆍ손등의 허물이 벗겨질 지경이었다. 그 다음에는 해판하여 모든 활자를 제자리에 넣어야 했다.
인쇄가 끝나면 인쇄지를 재단해서 분흥 포지로 제본하고 발송까지 신학생 손이 가야 했다.
그러기를 몇 해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1924년 8월에 프랑스 신부와 우리나라 신부 피정을 지도하기 위해 홍콩에서 드꼬망 신부가 초빙됐다. 이 신부는 교장 신부님과 동기 동창으로「빨리」의 방전 교회 홍콩 지부 나자렛 인쇄소의 지도 신부 겸 주필로 매달 「빠리」외방전 교회 홍콩 뷜뗑(Bulletin)잡지를 발간, 그 전교회가 담당하는 모든 지역으로 보내는 분이셨다.
피정 때 우리가 매달 겪는 고통과 꺼떡하면 품 떨어지는 난리를 들으신 모양이다. 원고만 홍콩으로 보내 주면 매달 그곳에서 무료로 인쇄해 주시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원고가 매달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교장 신부님 원고는 하도 악필이여서 쓴 사람만 읽지 남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원고 정서의 기구한 운명이 내게 떨어졌다.
원고를 받아 정서를 하려 들면 이건 지렁이가 기어가는지 구렁이가 꿈틀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몇 번씩 일고 도 읽어야 겨우 몇 줄 정서할 수 있었다. 돌스토이가 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악필이어서 그 부인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정서를 했다더니 내가 그 부인 역할을 하느라 진 신부님의 원고하고 신부가 될 때까지 싸우게 되었다.
신부님도 미안하셨는지 가끔『오요셉, 글씨 알아 볼만한가?』하고 물으시면 『네. 간신히 뜯어 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빙그레 웃으시며 뻐금뻐금 파이프를 빨아들이시는데, 그 연기가 독해서 재채기를 하면 미안하신지 얼른 올라가시곤 하셨다.
나도「따벨라」를 만들면서 문서에서부터 발송용 봉투 만들기까지 아니해 본 것이 없다.
그때부터 나는 매스콤의 중요성을 깨닫고, 내 사목 생활에 직접 간접으로 매스콤을 이용해야 한다는 각오를 새롭게 가졌다.
교황 삐오 11세 성하께서도 자신의 몸고상을 팔아서라도 출판물에 보조하겠다고 하셨고, 성 바오로 사도가 지금 세상에 다시 태어나신다면 저널리스트가 되실 것이 라고 까지 말씀하신 것도 사목에 매스미디어가 중요한 것을 각성시키신 줄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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