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을 가로지른 총성
‘탕! 탕!’
군중을 가로지른 총성과 함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쓰러졌다. 1981년 파티마의 동정마리아 축일이었던 5월 13일, 일반알현 중 저격당한 것이다. 불과 3m 거리였다. 당시 교황은 평소처럼 일반알현에 참석한 한 아기에게 강복하고 있었으며, 아기를 엄마에게 건네주고 저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아기와 교황의 모습은 이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복식을 알리는 포스터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현지 언론은 지금은 20살이 된 아기를 인터뷰하기 위해 미국까지 찾아가 그의 부모와 그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성 베드로광장에서 교황을 향해 총을 겨눈 이는 터키 출신의 메메트 알리 아그자라는 24살의 청년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를 태운 차는 전속력으로 사이렌을 울리며 곧바로 병원으로 달렸다.
복부와 손가락에 큰 상처를 입고도 다행히 교황은 목숨을 건졌지만, 병상에서 총상과의 사투를 계속해야 했다. 응급수술을 받아 고비를 넘긴 교황은 저격사건이 일어난 지 나흘 후, “나는 나를 저격한 형제를 위해 기도하며 그를 진심으로 용서했다”고 말했다.
5월 18일은 교황의 61회 생일이기도 했다. 생일을 5일 앞두고 저격당한 교황이 자신을 쏜 청년을 용서한다고 말한 것이다. 저격범의 총탄에 쓰러졌던 교황은 결국 두 번에 걸친 대수술과 93일간의 입원, 장기간의 요양을 통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당시 교황의 곁을 지켰던 경호원들은 교황의 경호를 수행하며 겪는 어려움에 관해 고백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1978년 교황에 즉위한 직후 측근들에게 자신이 신자들과 보다 완전하고 자유로운 접촉을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저격과 같은 신변상의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무엇보다 신자들과의 긴밀한 접촉이 그의 염원임을 강조했다. 예견된 신변의 위험이었고, 교황은 위험을 감수하며 신자들과 끊임없이 만나기를 원했다.
저격범의 어머니 무제이엔 아흐자도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제 아들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성격이 불안정하고 공격적이 됐습니다. 당신(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은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분이시므로 자비로써 제 아들을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교황은 그를 진심으로 용서했고, 교도소에 찾아가 ‘무엇이 진정한 용서인가’라는 용서의 정의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1981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 사상, 유례없는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저격사건 이후 처음으로 성 베드로광장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 저격 직전 아기를 안고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모습이 담긴 시복식 포스터.
▲ 쓰러지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저격 당시 모습.
성모 마리아와 요한 바오로 2세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17년 5월 13일 파티마 성모발현을 목격한 2명의 목동에 대한 시복식 미사 후 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메시지는 ‘파티마 제3의 비밀이 자신이 암살범에 피격된 사건을 예언한 것’이라는 공식발표였다. 파티마 성모 발현 83년만에 공개된 ‘제3의 비밀’은 역대 교황과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등 극히 일부에게만 간직돼 온 것이다.
교황은 당시 가까스로 생명을 건진 후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한 것은 성모 마리아의 손길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또 1982년 저격 1주년이 되던 날에는 파티마를 순례하고, 당시의 총탄을 파티마의 성모에게 봉헌하기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떠났지만, 성 베드로광장에는 여전히 군중들이 모여 있다. 관용의 지도자, 행동하는 교황, 사랑과 평화의 요한 바오로 2세를 군중들은 그리워하는 것이다.
교황 취임식에서 머리를 숙이고, 알현을 통해 그에게 강복 받기를 원했던 성 베드로광장의 군중들. 그의 선종으로 광장에 운집해 묵주알을 돌리며 진심으로 슬퍼했던 군중들과, 그의 복자됨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모자를 벗어 흔들던 군중들. 성 베드로광장과 교황,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군중들의 모습이 아련히 교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