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강연회에는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 전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 사무처장 하성호 신부, 사회복지회 상임이사 이정효 신부 등 사제·수도자와 신자 300여 명이 참석했다. 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와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김정숙 교수가 발표자로 나선 이날 강연은 ▲파리외방 전교회와 대구교구 : 드망즈 주교의 사목방향 ▲대구교구를 이끈 교구장 : 최덕홍·서정길 교구장을 중심으로 등 두 가지 주제로 진행됐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감사인사에서 “역대 교구장님들 모두의 공통점은 교구민을 사랑하고 교구 발전을 위해 진심으로 애쓰신 것이다”면서 “이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을 디딤돌 삼아 교구 새 역사를 함께 써 나가자”고 말했다.
▨ 파리외방전교회와 대구교구 : 드망즈 주교의 사목방향
“가장 큰 사목 목표는 한국인 사제 양성”
▲ 두봉 주교(전 안동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사목에서 첫 번째 목표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인 사제 양성’이다. 대구교구에 부임해 가장 먼저 이룬 업적인 ‘사목지침서’ 발간(1912)이나 매년 사제들의 피정을 직접 이끈 활동 등도 한국인 사제들이 보다 편하게 사목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배려였다. 한국인 신부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듣고 상담을 해 준 일도 많았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일을 했다. 드망즈 주교는 교회가 힘이 있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큰 건물을 짓는 것이 그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라 여겼다. 일제강점기에 가난하기만 한 교구에서 드망즈 주교는 성모님께 모든 것을 의지했다. ▲주교관·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설립했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의 대구 진출 ▲성직자 묘지 건립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 창간 등을 이뤘다.
드망즈 주교와 관련된 잘 알려진 일화가 있다. 드망즈 주교는 부임 초기 주교관·신학교·주교좌성당 증축을 루르드의 성모님께서 이루어주시면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 대구교구에서 일하던 소세 신부가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자 소세 신부를 살려주면 주교좌성당 증축에 앞서 성모동굴을 먼저 만들겠다고 다시 기도했다. 그 후 소세 신부의 병세는 거짓말처럼 회복되었고 드망주 주교는 약속에 따라 주교좌성당 증축에 앞서 성모당을 건축했다.
드망즈 주교는 한마디로 ‘기적같은’ 일들을 재임 기간 동안 이루신 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분이 대구대교구 초대 주교이셨음은 교구에 크나큰 축복이다.
▨ 대구교구를 이끈 교구장 : 최덕홍·서정길 교구장을 중심으로
“씨앗을 열고, 너와 나 꽃 피우리라”
▲ 김정숙 교수(영남대학교 국사학과)
제1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를 시작으로, 제르맹 무세-하야사카 구베에-주재용-노기남-최덕홍-서정길 주교 등으로 이어진 교구장들은 시대 안에서 대구대교구를 지탱해왔다.
‘나는 주추놓고 너는 기둥 세우리라’라는 큰 제목 안에서 최덕홍 주교와 서정길 대주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대구대교구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6대 교구장 최덕홍 주교는 최초의 한국인 대구교구장이었으며 대구 출신의 주교였다. 1948년에 대구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949년 1월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1954년 선종하기 전까지 6년간 재임했다. 최 주교의 재임기간은 짧았지만 이 시기 대구는 일제강점기 직후의 피폐한 상황에 6·25 전쟁까지 발발해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최 주교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교구를 흔들림 없이 이끌었고 성장시켰다. 최 주교가 사목기간 중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문화교육 사업으로 ▲천주교회보 복간 ▲대구매일신문 인수 ▲효성여자대학을 포함한 수많은 학교 건립 등을 이뤄냈다. 또한 ▲덕원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원이 공산화된 북한을 떠나 왜관에 정착할 수 있도록 기틀을 제공했으며, 신자가 증가하자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안동·밀양·거제성당 등을 짓기도 했다.
제7대 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는 1955년에 임명되어 1986년까지 재임했으며 전후 교회 재건과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상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1962년 대구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면서 대구대교구의 첫 대주교가 되었다.
서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해 새 시대에 어울리는 교회로 쇄신 운동을 이끌었고 ▲레지오 마리애 등 각종 신심단체를 도입하고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대회를 이끌었으며 ▲SOS 어린이마을, 칠곡 가톨릭 피부과 병원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교구는 이 시기 크게 성장했는데 서 대주교의 취임 당시 46개였던 본당은 79개로 증가했고, 신자수는 7만2천 명에서 20만 명으로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