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각국의 노력과는 별개로 지진 피해 이후 일본을 찾는 관광객들이 현저하게 줄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관광지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나가사키현이다. 일본 교회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은 한국 신자들이 자주 방문한 지역이었다. 지진과 원전 문제가 불거지면서 성지순례를 계획했던 순례객들은 일정을 취소했다. 이때문에 3월 이후 한 명의 순례객도 나가사키현을 방문하지 않았다.
이에 나가사키현은 다양한 성지순례 코스를 마련하고 있다. 운젠 순교제를 맞아 한국 신자들을 초대한 나가사키현이 준비한 성지순례지를 소개한다.
성 야고보 토모나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무라마찌성당
나가사키현 오오무라에 위치한 무라마찌성당은 1633년에 순교한 성 야고보 토모나 신부(도미니코회)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야고보 토모나 성인은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50시간이나 견디면서도 신앙을 지킨 성인이다.
오오무라는 1562년 히라도에서 포르투갈 선장과 다수의 상인이 살해당하는 ‘미야노마에 소요 사건’ 이후 일본의 국제항이 열린 지역이다. 자연스럽게 가톨릭 문물도 이 지역으로 옮겨왔다. 오오무라의 영주가 사제들로부터 감화를 받아 1563년 세례를 받는다.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받은 영주 오오무라 스미타다는 일본 다이묘 중에는 최초로 신자가 되었고, 이 지역은 가톨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사원과 교회가 보이는 풍경 ‘히라도성당’
일본에 가톨릭 신앙의 불씨를 심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와 동료들은 1549년 가고시마에 도착한다. 이듬해에는 히라도로 선교지역을 옮겨 가톨릭의 꽃을 피운다. 한 달 만에 100여 명에게 세례를 줬으며, 그가 전한 복음은 1년 사이에 널리 퍼졌다.
히라도성당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기념하는 성당이기도 하다. 1931년 완성된 성당은 콘크리트 구조로, 정면 중앙에는 큰 탑이 있고 왼쪽에는 작은 탑을 배치했다. 이와 더불어 창과 문의 뾰족한 아치, 중앙 탑을 에워싼 뾰족한 탑, 측면의 플라잉 바트레스(고대 건축물에서 지붕에 뾰족한 탑을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치구조) 등 하늘로 향하는 수직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벽과 기둥에 입혀진 마블무늬는 전통적인 회반죽 기법을 사용, 히라도의 높은 미장공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히라도성당이 유명한 이유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때문만은 아니다. 항구에서 이곳까지 올라가는 길에 불교 사원이 있어, 성당과 사원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산책로를 만들고 있다.
‘시마바라의 난’의 흔적이 남아있는 시마바라성
시마바라의 난은 17세기 중반 가톨릭 신자 농민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가톨릭에 대한 탄압과 과도한 부역, 중세가 계기가 되었다. 반란은 1637년 10월부터 1638년 2월까지 계속됐다. 시마바라성을 근거지로 일어난 반란을 주도한 장수는 16세의 독실한 신자 아마쿠 사시로(프란치스코)다. 그와 함께한 3만7000여 명의 반란군들 대부분 신자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료에는 당시 반란군과 부녀자, 노약자들이 모두 전투 중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혀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한다.
시마바라성에는 현재 당시 반란군들이 사용했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성모 마리아를 닮은 불상과 부처의 몸체를 분리하면 십자가가 등장하는 불상, 십자가를 새겨 넣은 신자 무사의 칼 손잡이 등 모진 박해에도 꿋꿋이 신앙을 지켜간 일본 신자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 무라마찌본당 주보성인인 아고보 토모나 성인은 1633년 나가사키에서 순교했다.
▲ 시마바라의 난을 이끈 장수 아마쿠 사시로(프란치스코). 당시 16세에 불과했던 사시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 사마바라의 난 근거지가 된 시마바라 성. 현재는 난에 참가한 반란군의 유품과 흔적 등이 전시돼 있다.
▲ 시마바라 성 전망대에서 바라본 시마바라 모습.
▲ 무라마찌성당에서 미사 후 한국 순례단이 본당 주임 나카무라 이키아키 신부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