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의 뿌리이자 복음화의 산실이 돼왔던 왕림본당이 1988년 11월 1일 설립 100주년 행사를 치렀다. 가톨릭신문은 10월 30일자부터 왕림본당 100주년 예고기사, 사설 등을 쓰며 신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축하했다.
“11월 1일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 111 현지에서 개최되는 100주년 기념행사는 오전 10시30분 기념미사를 시작으로 기념식, 축하연 등의 순으로 이어진다.”
가톨릭신문이 실은 왕림본당의 기사를 검색하다보면, 100주년이 되기 3년 전인 1985년부터 전 신자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애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신자들은 100주년을 앞두고 성당 신축 및 본당 100년사 발간작업 등 여러 기념사업을 기도로서 후원하기 위해 묵주기도 100만단 봉헌운동을 전개했다.
어떤 본당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왕림본당 신자들이 100주년에 더 많은 의미를 둔 것은 왕림이 1839년 기해교난 때부터 한국천주교회사가 얽힌 유서 깊은 곳이기에 그러했다. 1982년 가톨릭신문은 왕림에 대한 기획기사를 발표하고, 왕림(갓등이)이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살면서 형성된 전형적인 교우촌이라고 전했다.
“당시 앵베르 범 주교, 모방 나 신부 등 이곳 갓등이에 공소를 설정, 전교활동을 벌이면서 관헌들의 감시를 피하여 서울→수원→충청도를 왕래하는 선교사들의 역로였다. 따라서 왕림본당의 전신인 갓등이공소는 한국지방선교의 기착지 역할을 한곳이기도 하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되고 신교의 자유가 도래하자 갓등이(왕림)공소는 1888년 7월 서울 관할의 공소에서 분리, 한강 이남의 충청도?경기도 지역에서는 첫 번째 본당으로 설립된 역사 깊은 본당이 됐던 것이다.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왕림본당은 파리외방전교회 안학고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12칸짜리 초가성당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미리내(1896년), 하우현(1900년), 북수동(1906년), 발안(1956년), 남양(1961년), 정남(1975년) 등 많은 본당을 직접 분가시키며 교구의 역사적 뿌리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해왔다.
왕림본당 신자들은 1988년 11월 1일 100주년 기념미사와 행사를 통해 100년 이상 된 십자가 등 본당에서 전해지는 여러 성물과 제의, 서적 등을 전시하며 본당의 역사를 전하기 위해 애썼다.
현재 왕림본당은 설립 120주년을 넘긴 어엿한 교구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자리한다. 교구 또한 그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교구 설정 50주년 준비 노력의 하나로 왕림성당 성역화를 선포했다. 본당 신자들은 100주년 때처럼 현재도 구역별 묵주기도운동을 펼치며 2010년에만 140만단을 봉헌하는 등 신앙을 전하기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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