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틈엔가 말씀의 전례로 이어져 복음이 낭독됐다.『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복음 1장26절에서 38장까지 봉독된 복음 내용는『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이사야(7장14절)의 예언이 무염시태의 신비로 구체화됨과 동시에 이 예언으로부터 전 세계의 구원 사업이 시작됨을 명백히 전해 주고 있었다.
드디어 교황의 강론. 이미 성전에 들어 서기전 특별 성년의 참뜻을 설명한 바 있는 교황은 이날 개막 미사 강론을 통해『오늘 시작되는 성년 기간 동안 전 세계 모든 신자들은 교회가 그 안에 하느님의 선물인 구속 은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인식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교회와 신자들은 모든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이전보다 더 큰 기쁨으로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자』고 호소했다.
이어 교황은『인류역사에 구원의 기념제로 기념될 이 성년이 매일 매일 우리들에게 주님의 해(年)가 될 것을 확신한다.』고 강조, 특별 성년이 은총과 구원의 시기임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미사 중 줄곧 지켜본 교황 성하의 모습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세 시간 가까이 소요 되는 예절을 집전하면서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목소리는 대성전을 압도 했으며 오직 평화의 분위기만을 느끼게 했다. 지난 81년 돌발했던 저격 사건 이후 몇 번의 수술을 거치면서도 무거운 직무를 쉴 수 없었던 교화 성하, 세계6억 신자의 정신적 지주로서 완전히 자신을 봉헌하고 있는 교황 성하께 우리는 미사 중 내내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있다.
악몽같은 저격 사건 직후인 81년12월 성탄 대미사에서 뵈었던 교황 성하는 피격 이후 악화된 건강으로 병색이 뚜렷했으며 조국 폴란드의 암울한 정세는 교황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는가!
저격 사건 이후 교황 성하의 경호는 상당히 강화되었음을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외부 행사의 경우「만일」에 대비하기 위한 경호는 눈에 뜨일 만큼 엄격해 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경호ㆍ엄격한 분위기도 교황 성하를 통해 흘러나오는 평화의 빛만은 침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보여주는 평화의 분위기는 깊고 강렬했다.
특별 성년 개막 미사에서 신자들의 기도는 모두 6가지 지향으로 봉헌됐다.「교황 성하ㆍ모 든 사목자와 신자들을 위한 기도」로 시작된 신자들의 기도는「정의ㆍ평화ㆍ공동선을 위 해, 특히 위정자들이 그들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복음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그들의 마음을 열고 구원자의 은총인 말씀을 받아들이도록」「병자와 버림 받은 이들이 희망 속에 살 수 있도록」「모든 죄인들이 성년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받도록」「죽은 모든 이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간절한 염원으로 이어졌다.
우리 일행도 비록 말은 없었지만 분단의 현실 속에 아픔을 겪고 있는 조국의 통일과 2백주년을 앞둔 조국의 교회를 위한 특별한 지향으로 마음과 마음을 모았다.
옆자리의 자매 한분이 갑자기 내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무릎에 놓았다. 졸음을 이기기 위해 무릎을 꼬집어 달라는 안타까운 사인이었다.
입장에서부터 이어진 시간은 총5시간여. 그 시간 동안 우리 일행 모두는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잠은 사정없이 우리를 파고들었다. 낮과 밤이 뒤바뀐 지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의 위안이 되긴 했지만 우리는 불경스런 마음을 도무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특별 성년 개막식 제일 앞좌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졸음과 싸우고 있다니.
3월23일 낮12시30분 김포공항을 출발한 후 24일 오후에야「로마」레오날드 다빈치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만 하루 이상을 공중에서 보낸 여행자답게 이미 상당히 지쳐 있었다.
특히 연세가 높은 몇 분은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피곤함이 역려 했다. 특별 성년 개막 미사참석 시간이 임박해지자 그 같은 우려는 쓸데없는 기우인 듯 했다.
한국에서부터 소중히 가져온 한복으로 갈아입는 그시각부터 일행의 모습에선 그어떤 피곤함의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앞좌석을 상징하는 빨간 빛깔의 입당 권을 손에 쥐고 성베드로 대성전을 향하는 일행의 눈빛은 흥분과 기대로 반짝였으며 그 발걸음은 가볍고 씩씩해 보였다. 광장 입구에서 부터 성전 입장에 이르는 동안 우리는 여러 번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가 우리의 진로를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한복!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의 우아한 우리 한복은 광장을 메운 수많은 인파로부터 아낌없는 경탄을 받았다. 우리를 향해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솟아오르는 진한 감동과 행복감은 모두의 피곤을 저만치 멀리 쫓아내고 있었다. 성전 안에서도 우리의 한복은 단연 돋보였다.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몸둘 바를 몰라 하던 일행이 평정을 되찾고 묵상에 잠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시작된 바티깐 대성전의 일정이 5시간으로 접어드는 동안 멀리 달아났던 피곤의 조각들을 다시 일행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무릎을 꼬집는 것도 그때뿐, 이겨내려 애쓰면 애쓸수록 쏟아지는 졸음은 우리를 괴롭 혔다. 얄미운 잠, 그때만큼 잠이란 것이 그렇게 야속하고 미운 적은 없었으리라.
문득「겟세마니」에서 피땀 속에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회초리 되어 날아 왔다.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날 수 없단 말이냐?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마태26장40절)수난을 앞두고 극심한 고통 중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그분의 간절한 뜻을 뒤로한 채 자고 있는 제자들, 그리고 우리들. 나약한 의지와 겨자씨만도 못한 믿음이 슬펴져 우리는 가슴을 쳤다.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키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살까지 남김없이 주시는 성찬 전례를 절정으로 1983년 특별 성년 개막 미사는 막을 내렸다. 우리 일행은 교황 성하께서 성전을 한 바퀴 돌아 퇴장하신 후에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터 솟아오르는 감격이 뜨겁게 온몸을 적시면서 우리 모두를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여! 특별 성년 구원의 빛이 북녘 어두움을 비추게 하소소.
주여! 2백주년을 맞는 한국 교회를 성령의 불길로 새롭게 하소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