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으뜸인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 전서의 말씀을 통해 주교의 자격을 다음과 같이 간파하셨다.
『교회의 주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훌륭한 직분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교는 탓할 데가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제성소의 못자리인 용산 신학교는 주교님들의 못자리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용산 신학교 교수를 지내시다가 주교가 되신 분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우선 1920년 9월 13일부터 그해 성탄까지 라틴어를 가르치시던 유 에밀리오 드브렛 신부님은 서울교구장 미 주교님의 보좌주교로 발탁되셨고, 1921년 5월 1일에 베네딕또회 대원장 신 보니파시오 사무엘 신부님과 같이 축성을 받으셨다. 신 주교님은 함경도와 만주의 연길까지 담당한 교구장 겸 대원장이었다.
유 부주교님은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을 하시다가 1926년 1월 18일 아침 삐숑 네오 송 신부와 담화 중 뇌일혈로 운명을 달리 하셨다.
두 번째는 원 아드리아노 라리보 신부님이 1927년 5월 1일 민 주교님 주례로 축성되어 제2대 보좌주교가 되셨다.
1926년 12월도 다갈 무렵 민 주교님이 우리가 주일 만과경을 성당에서 함송할 때 느닷없이 성가대에 나타나셨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무슨 큰 변이 생겼나 했더니 만과경을 끝내고 제의 방으로 들어온 원 신부님에게 민 주교의 보좌주교로 임명한다는 삐오 11세의 사령 전보를 보여주셨다. 그때의 원 신부님의 희색만면한 얼굴이 판화처럼 오늘도 눈에 떠오른다.
은사님으로 부주교가 되신 유 신부님과 원 신부님 이전에도 여러분의 주교가 용산 신학교 교수님 가운데서 나오셨다.
1911년 6월 11일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양분되면서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용산 신학교에 봉직하시던 플토리아노 드망즈 신부님이 주교가 되셨다.
이전에는 1906년 10월 19일부터 1910년 12월 30일까지 「경향신문」 사장을 지내셨고 부록으로 「보감」을 발행하면서 달레의 「대한 성교 사기」를 번역 수록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경향신문」이 폐간 당하자 1911년 1월 15일부로 「경향잡지」를 매월 15일과 말일 월 2회를 발행하신바 있다.
네 번째로는 김 스테파노 양홍(金洋洪) 신부로, 김 신부는 「삐낭」으로 유학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 신부가 된 13분 중 한분이다. 1900년 용산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31년 조선교구 창립 1백주년 기념으로 대구 안 주교님이 전주교구를 독립시켜 「전주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시고 그해 5월 9일자로 김 신부를 첫 전주 대리로 임명, 발령하셨다가 1937년 4월 15일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 교구장직을 사임하시고 광주교구 나주 등지에서 주임신부로 계시다가 1945년 5월 3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다섯 번째는 지금 생존해 계신 노기남 대주교님을 꼽을 수 있다.
1942년 1월 18일 서울교구 한국인 교구장으로 착좌식을 받으시고 일제하에서 많은 각고와 근심을 겪으셨다.
1930년 10월 30일 신부가 되시고 10년 동안 명동본당 유 신부님의 충실한 보좌신부 노릇을 하신 분으로, 1967년 3월 27일 젊은 세대에게 맡기시고 용퇴하셨다.
여섯 번째는 홍 프란치스꼬 용호 신부로 우리 반 반장이었다.
1933년 신부로 서품 받고 평양교구 신부로 봉직하면서 1934년 『가톨릭 연구」ㆍ1936년 「가톨릭 조선」을 한글로 발행했다. 제2의 서울 평양 한복판에서 우리말 말살 정책이 한창인 일제하에 한글 월간 잡지를 꼬박꼬박 냈던 것이다.
우리는「용호」라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용같은 기백으로 조선 13도에 널리 널리 한글의 글을 주는 사나이」라고 풀이했다.
1944년 6월 29일 평양 양촌 교회에서 주교 성성식을 신 보니파시오 주교(덕원면 속 수도 원장겸 교구장)로부터 받았다 당시 관후리 본당은 일본 군인에게 점령당한 채였다.
해방 후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다가 1949년 5월 서포 수녀원 방문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공산 당원들에게 납치돼 간 뒤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일곱 번째는 주재용(朱在用) 신부로 1911년 6월 11일 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독립 분할될 때까지 용산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고 신부 서품을 대구 안 주교님께 받으셨다.
김양홍 전주교구장이 사임하자 전주교구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으신 뒤 대구교구장을 역임하셨다. 대구교구장직을 사임한 뒤 춘천교구에 몸을 맡기셔서 춘천시 효자동 저택에서 한 신부로 기구한 운명을 반신 불수병으로 마치셨다.
신학교 (SEMINARIUM)라는 어의는 못자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용산 신학교는 신부의 못자리일 뿐 아니라 일곱 분의 주교님 교구장님들의 못자리도 된 셈이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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