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월 19일字로된「까바이에ㆍ꼴」상점의 견적서는 명동 대성당의 대형 오르간에 대한 구조를 비롯, 조립에 따른 세부 내역, 그리고 가격 등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까방이에ㆍ꼴 상점을 대표하는 뮤땡씨는 견적서에서 명동 대성당에 납입할 대형 오르간은 舌竹을 쓰지 않고도 최대한의 효과를 내도록 조립하겠지만 적은 기후변화, 먼지, 벌레 등에 대해 아주 쉽게 음조가 틀려질 수 있다는 등 제작하게 될 오르간의 조건 등을 적어 보냈다. 조립 세부 내역을 살펴보면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장식을 전혀 하지 않겠으며 겉을 치당하는 비용으로 오르간 내부를 더욱 알차게 만들겠다는 등 꼼꼼하면서도 성의를 다한 까바이에ㆍ꼴상점의 태도는1918년 주문을 받고도 숱한 변명으로 제작을 미루어오다 급기야 1922년 계약을 파기하기까지 트통쉐 신부와는 상당한 대조 현상을 보이고 있다.
주문을 받자마자 보낸 까바이에ㆍ꼴 상점 뮤땡씨의 1차 견적서는 명동 대성당 오르간 구입 한국 책임자(당시 명동 주임)인 뽀아넬 신부(Po-isonel)가 보낸 의견서에 의해 내용 일부를 수정하게 된다. 노기남 대주교가 보관해 온 관련 자료 속에는 한국 측에서 프랑스로 보낸 편지들이 포함돼 있지 않으므로 수정 요구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편지들을 종합해 보면 첫 번째 견적서는 한국의 기후 조건ㆍ명동성당의 규모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져 이 점을 보완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사실 첫 견적서 조립 세부 내역에 기록된『덥고 습기 찬 나라에 대비 한다.』는 내용과 이어 보낸 편지 중『건반을 2개로 늘이고 중감 장치를 새로 부착한다.』는 내용에서 한국 측의 수정 요구는 명확히 드러나고 이 의견이 그대로 받아들여졌음을 알게 된다.
어쨌든 1918년부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어져 온 명동 오르간 제작은 6년만인 1924년 1월 중순 역사적인(?) 완성을 보게 된다. 24년 1월 21일 까바이에ㆍ꼴 상점에서 제라르 신부(한국 측 현지 연락책임)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이 명동 오르간의 완성 상황을 적고 있다.
『오르간을 서울로 발송하기 위한 지시 사항들을 가능한 빨리 보내 주시면 하겠습니다. 오르간은 지난주에 수납(受納)되었습니다.』
드디어 명동 대성당의 파이프오르간은 3개의 상자로 분리돼 1924년 2월 1일, 까바이에ㆍ꼴 상점을 출발, 「마르게이유」를 거쳐 제물포, 그리고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특히 오르간 발송을 마치고 뽀아넬 신부에게 보고의 편지(2월 10일字)를 보낸 제라르 신부는『오르간이 제물포와 서울에 도착되면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까지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라고 장당, 오르간의 놀라운 규모를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일제치하에 있던 당시의 역사적 아픔도 함께 느끼게 해주고 있다.
제라르 신부는 또『명동으로 보낸 오르간은 겉으로 보기에 썩 좋은것 같지는 않지만 싼 가격에 비해서는 아주 좋은 물건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현지 전문가의 평가를 인용하면서『귀로 듣는 오르간』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데 전후 사정으로 보아 명동 오르간이 한국에서는「대단한 물건」이 되겠지만 현지에서는「그리 대단한 물건이 아니다」라는 점도 아울러 감지하게 해주고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오르간이 서울에 도착한 날짜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 오르간과 관련된 전체 자료 중 그 어떤 곳에서도 오르간의 도착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해 5월 15일 서울 교구청이 당시 서울 세관장이던 일본인 게이쬬씨에게 세 개의 화물에 대한 관세를 면하게 해 달라는 부탁 자료에 의해 24년 5월 15일 이전이었을 가능성만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사연은 9년여에 걸친 각오 끝에 한국 교회에 설치된 첫 오르간이 설치 초기에서 부터 임자(?)가 거의 없어 푸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빠리 외방 전교회의 변보댕 신부(Joseph Bodin)는 몇 동 오르간을 다룰 수 있던 몇 사람 중 한사람에 속했다. 음악을 전공한 변보댕 신부는 명동 오르간을 설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숨은 은인이라고 할 만큼 오르간 구입 계획부터 적극 참여했었다.
오르간 구입에 대한 변 신부의 열정은 1918년 가스중독으로 보상받았던 연금 전액을 오르간 구입에 봉헌한 사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던 변 신부는 가스중독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본국과 일본으로 휴양을 떠난 후 명동 파이프 오르간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휴식 상태에 들어가야만 했다. 긴 잠을 자던 명동 오르간은 1935년경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변 신부에 의해 잠을 깨고 화려한 연주의 나날을 맞게 된다. 변 신부에 이어 故 이문근 신부는 파이프오르간을 자유자재로 다룰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 신부(신자도 물론 없었지만)였다.
1945년 변 신부가 선종하고 6ㆍ25를 맞으면서 격동하던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명동 오르간은 차츰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한국의 습도 기후 등을 충분히 고려해서 제작한 오르간이었지만 조금씩 변하는 음색을 조율하거나 부분적인 고장을 전혀 수리할 수 없었던 것이 주요 원인 중의 하나였다.
명동 대성당 2층 한구석에 쓸쓸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오르간은 60년대 들어 결국 명동 주임이던 양기섭 신부가 미국에서 새로운 오르간을 구입해 오면서 명동의 첫 오르간은 영광의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20여년. 명동 대성당은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거의 완전히 잊혀져 가고 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잊혀져 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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