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일은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양반집에서 태어나 유학에 힘쓰던 선비였다.
초대 한국 천주교회는 준 성직 제도의 자치 교회를 설립했으나 교리 지식의 부족으로 지도급 신자들이 미사 봉헌 고백 성사를 하기도 했다. 가성 직자에 의한 교회 사목이 1년여 계속되는 동안에 교리 지식의 연구가 더욱 진행되면서 가성직 조직에 대한 의문을 풀게 되어 그에 대한 교권적 해석을「북경」주교에게 구하기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결의했다.
이때에 중대한 사명을 띠고「북경」에 파송받은 이가 곧 윤유일이었다.
윤유일은 초기 교회 지도자의 한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 교육을 받던 예비신자로 매우 침착하고 자상하면서도 대담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국가적 사명을 띠지 않은 사람의 외국 여행은 법으로 금지되었고 이를 어기는 일은 곧 사형을 자처하는 것이 되는 국법 위반이었다.
그는 1789년 10월에 조선을 떠나 갖은 고생을 다하며「북경」주재로오 신부에게 이승훈ㆍ권일신 등의 이름으로 된 조선 교회의 밀서를 전했다.
성직자 파송의 약속을 받은 예비신자 윤유일은「북경」에서 자청하여 영세하고 성체를 영하고 견진성사마저 받고 귀국하는 기쁨을 맞았다.
윤유일은 1794년 12월23일 몇 차례 조선 입국에 실패한 주문 모신부를 결빙한 압록강을 넘어 조선 왕국으로 잠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1795년 6월에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진 을묘 실포 사건으로 윤유일은 그해 6월27일에 주문모 신부 영입에 주역을 담당한 죄로 체포되었다.
박해 관료들은 이들로부터 주 신부의 행방을 알기 위해 사정없이 고문을 가한 끝에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고 믿음의 기쁨으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곤장 아래서 목숨을 거두고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그의 시신은 박해자에 의해 강물에 던져져 시신조차 남겨 놓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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