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겨울이 닥쳐왔다 노기남(현재 대주교) 신학과 학생은 진 베드로 교장 신부님 사무실과 침실 당번이었다.
당시는 연탄도 없고 물론 스팀도 없던 시정이었다. 각 교실과 교수 신부님들 사무실에는 난로가 설치돼 있었는데 연료는 대신학교 주변에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였다. 늦가을부터는 이들이 순교를 당하게 마련이었다.
통나무를 일찌감치 장작으로 만들어 놓아야 초겨울에 잘 마른 나무를 땔 수 있었으므로 톱으로 토막을 치고 잔가지는 불쏘시개를 만들어 다발로 묶은 뒤 자기가 맡은 교실이나 교수 사무실에 날랐다. 그런데 노기남 학사님이 묶어 놓은 장작 다발에는 손도 못 댔다. 교장 신부님용으로 도장이 찍혀진 셈이었다.
나는 철학과에 들어가면서 우리 강의실과 연구실 두 군데를 맡았다.
가을부터 내내 아카시아 나무를 자르고 도끼질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거기다가 시간만 나면 두 교실에 가뜩 석탄을 날라야 했는데 위가 좋지 않아 흰죽에 간장을 찍어 먹는 내 처지로서는 지하실에서 석탄을 한 궤짝씩 2층으로 두 번을 오르락내리락하면 층계 가운데에서 하늘이 돌고 땅이 돈다. 온몸에는 함빡 진땀이 난다.
그래도 남 보고 도와 달라 소리를 못했다.「이것이 내가 사제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로에 넣을 석탄을 던저 차곡 차곡 채워 놓고 틈만 있으면 노기남 학사님하고 아카시아 나무를 자르고 쪼개곤 했다.
하루는 내가 지쳐서 도끼질하는 게 안쓰러웠던지 예산 신예원 출신의 철학과 후배인 김 베드로 영식(金永植)이 내 도끼를 빼앗아서 며칠 동안 장작을 패주었다. 내가 하겠다고 우겨도『밤낮 흰죽만 먹고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하나?』하면서 사랑의 선물을 전해 준 것이다.
꼬린토 전서13장4~6절이 말씀처럼 사랑은 친절하며 성내지 않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내게 고맙게 해준 김 베드로가 갑자기『아이고! 나 죽겠네!』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게 아닌가. 내 사정을 봐주려고 장작을 쪼개던 김영식 후배의 오른손인지가 그만 도끼에 찍혀 잘라진 것이다.
김 베드로는 얼떨결에 떨어져 나간 오른손 인지 첫 토막을 집어다 갖다 붙이고 흙으로 덮어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나도, 노기남 학사님도 같이 앉아 있다가 놀라서 정신이 멍했다.
『저걸 어떻게 하지』
모두 서성거릴 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노기남 학사님은 교장 신부님에게 이 큰 사고를 보고 드렸다. 교장 신부님이 한걸음에 달려와 보시더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지고 말았다.
급한 대로 응급치료를 하고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외과 의사도 별도리가 없다고 했다. 1928년만 해도 외과 기술이 변변치 못한 시대였는데, 끊어진 인지가 붙기는커녕 흙과 뒤범벅이 돼 있었고, 시간이 너무 지체돼 접합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른손 인지는 어떻게 되느냐?』는 우리들의 질문에 의사는 인정사정없이『손가락 병신이 되는 거지요』해 버린다.
이제 잘라진 손가락 토막이 제자리에 붙기는 영 틀린 일이었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다.「김 베드로가 신부가 되느냐? 못되느냐?」신학적으로 말썽이 생겼다.
신부가 되려면 사지백체가 온전해야 한다. 곰보는 신부되기에 그리 큰 지장은 없으나 일만이천 봉 억죽덕죽 콩밭이 된 얼굴은 곤란하다. 신부의 얼굴이 너무 잘 생겨도 곤란하지만 아주 못생기면 신부되는데 지장이 생겼다. 수수하게 생겨야 수수한 신부가 된다고 할까. 손가락, 그것도 매일 미사 때 양손의 엄지와 인지로 성체를 거양해야 하는데 그중 한토 막이 없으니 신부되기는 영 그른 것이다.10여년 공든 탑이 두 끼 날에 무너진 셈이다.
이 문제가 민 대주교ㆍ원 부주교 및 교구 참사 위원회에 회부돼 왈가왈부 논쟁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때만 해도 서울교구 내 우리나라 신부수가 60명을 헤아렸으니 김 베드로의 사제품은 구름에 막히고 말았다.
조실부모하여 형수의 젖을 먹고 자란 불쌍한 김 베드로는 사람 됨됨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이 착하고 어질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신부가 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불쌍한 일이 닥친 것이다.
좌절감에 잔뜩 찡그린 베드로의 얼굴, 시들은 방초 같아진 그의 운명…
그때다 용감한 민 대주교님은 과감한 판결을 내렸다.『사람 착한 베드로와 그를 신학교에 보낸 뻬렝백 신부(당진 합덕 본당 주임)의 낯을 봐서라도 신부를 만들자.』
조선교구 설정 이후 손가락 한마디가 없는 신부님이 처음으로 탄생케 됐다. 민 대주교님은『주교의 직권으로 불구자이나 관면을 준다. 그러므로 김 베드로는 신부가 될수 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김 베드로는 1937년 2월 20일 멜키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의 볼에서는 하염없는 두 줄기 눈물이 제의 자락을 적셨다.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다 곤경에 빠진 김 베드로 신부는 새로운 사제상을 세운 셈이다.
김영식 신부는 보좌와 본당 주임을 거쳐 연백에서 고아 원장을 지냈다. 1ㆍ4 후퇴 때 80명에 가까운 고아들을 데리고 연백에서 부산까지 피난갔으며 수복 후에는 후암동 주임신부로 일하면서 지금의 부천시인 소사에「성모자애병원」을 설립, 운영했다. 지병인 폐결핵으로 선종할 때 김신부는 한국 복자 수녀회에 그 병원 전체를 넘긴다는 유언 한 장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늘 마음에 걸려 죄송했던 김신부님, 영원히 나를 용서하소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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