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부속중학교 3년째 되던 어느날 목요일 지금의 국립묘지 자리인 동작리 별장으로 이 안드레아 순성 부제님과 산보를 가게됐다. 이얘기 저얘기 주고받다가 역사담이 벌어졌다.저 새남터를 우회하면서…
이 부제님=우리 신학교가 용산 함벽정으로 옮겨온 1887년 이전에는 어디있었지요?
필자=글쎄요.강원도 부흥골(지금은 충북 여주)인줄 알고 있읍니다.
이 부제님=그렇지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1885년부터 87년봄까지 3년간 조선에 제2신학교가 있었지요.그곳에서 용산으로 이사를 온거랍니다.
필자=그런데 그곳에선 누가 신학공부를 했지요?
이 부제님=1836년 12월 9일 김 안드레아 대건ㆍ최 토마 양업ㆍ최 프란치스꼬 세 소년을「마카오」로 보내 신학교공부를 시키든지「뻬낭」으로 보내든지 양단간에 선택해서 신학을 공부하도록해 한국인신부를 배출하려고 했지.결국「뻬낭」으로 아니보내고「마카오」의「빠리」외방전교회 결리부에서 공부를 시켰지요.
필자=이 세분중 김 신부님과 최 토마 신부 두분만이 성공하셨읍니다. 그러다가 1855년 조선땅에 첫 신학교가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지금 제원군) 배론에 설립돼 1866년 3월까지 10년간 유지해 오다가 병인박해로 폐교됐습니다.
이 부제는 내가 신학교역사를 제법 잘알고 있는데 놀라는 눈치였다.우리 두사람의 역사문답은 여전히 계속됐다.
이 부제님=두번째 신학교가 부흥골에 선것은 1885년인데 쉬쉬해가면서 가만히 설립됐지요.
필자=부흥골은 범골이라고도 불리웠어요.그 고장에 범이 하도많아 범골, 범골하던것이 부흥골이라 불리우게 됐다는군요.
이 부제님=1885년부터 이듬해 사이에 부흥골 신학교에 큰일이 벌어졌지 뭐냐.
필자=큰일이라니요? 불이 났어요.
이 부제님=부흥골 신학교 운영이 서 바라발약실 신부님께 위인됐는데 교장신부로는 루이빌 유달영 신부님이 취임했지요.
백 부주교님이 위임을 받아 신학생 훈도에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1886년 춘3월에 강원도 부흥골신학생 7명이 서울 구경을 떠났지.
두리번거리면서「여기가 어디유? 예가 우리 임금님 사시는데유?」하고 솜저고리, 솜바지차림에 놋주발에 점심을 싸서 망에 넣어 걸머지고 말여.그만하면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꼴은 된 셈이지.
필자=그럼 구경 잘했나요?
이 부제님=거울 아홉개 놓고 보는 게 구경이지?(「하하」농담을 해놓고 이 부제님이 웃으셨다)
유 신부님이 지금의 정동박 신부(뽀아넬) 댁에 잠깐 들어간 틈에 이 촌놈 꼬마신학생들이 저 광화문속으로 걸어들어간 거야.눈은 왕방울만 해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보았지.
필자=그거 큰일 났군요
이 부제님=큰일이다 뿐인가. 난리가 났지.
파수를 보는 나졸들에게 들켜 체포돼 옥에 갇히고 말았지.
필자=체포된 신학생들은 누구 누구였지요?
이 부제님=지금(즉 1926년 당시) 경향잡지사 사장하시는 한 바오로 기근, 이 아우구스띠노, 이 바오로 그리고 최 토마 신부의 사촌동생인 최 루까, 전 안드레아, 유 안또니오, 최 요아킴 이렇게 일곱명이었지.그중에는「뻬낭」에서 공부하다 소환된 신학생들도 있었으니 난리치고는 큰난리가 난것이지.
필자=자는 범 코침 준셈이네요.
이 부제님=그래가지고 1886년 한불조약 9조2항 敎誨문제와 4조 6항護昭조항을 놓고 관리들이 말이 많게 됐어.이견이 분분해지자 1892년 8월5일 기공식까지 한 명동대성당 건축이 불법이라고 조병식 외무대신이 성당일대에 복병까지 시켜놓고 억제를 했지.얻은 신앙의 자유에 다시 박해의 불을 지르느냐 마느냐 하는 지경이 될까봐 북경서 블랑시 전권대사까지 찾아왔어.
필자=갈수록 가경입니다 그담엔 어떻게 됐나요?
이 부제님=국제법상 수호조약 원문대로 유권해석이되고 고종 황제가 친히 하건을 매듭지어 꼬마신학생들도 석방되고 명동성당도 계속 짓게 됐지.명동성당은 1893년부터 1898년 5월 29일 낙성되기까지 만6년이 걸려서 지었어.
필자=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지 1년이 될까말까할 때 다시 박해가 일어날 뻔 했읍니다.
두사람 사이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어느새 가슴이 시원해져 보니 동작리별장 솔밭이었다.
천주교가 이땅에 들어온 이후 1백3년간의 형극의 길을 걸으며 3천리 금수강산 골짜기마다 순교자의 피와 땀과 한숨으로 꽉 채워졌다.서럽던 세월도 지나가고 서릿발도 녹아 이제 앞산뒷산에 진달래 피듯 신앙의 새 싹이 돋는가했는데 박해가 재엄습해 오려했으니 그 얼마나 아슬아슬했는가.
지나고나니 불행중 다행한 일의 하나인 셈이다.
한편 이 부제님은 그후 신부가 되시어 황해도 신계정봉 주임신부로 봉직하시다가 6ㆍ25때 납치돼 행방불명이 되셨다.
지금도 광화문을 볼적마다 光化門이 光火門이 될뻔한 그시절을 생각하고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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