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은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빼앗긴 내조국, 내 나라, 내 강산, 우리 한민족의 얼을 되찾으려는 불꽃이 타오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때 수원 공립보통학교를 오목내(梧木川)에서 20리길을 매일 걸어다녔다. 그때 수원「꽃바다」에서 일본 헌병이 예배당에 신자를 소집하고 밖에서 문을 잠근 뒤 석유를 뿌려 생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다. 이 난리 통에 반항하는 군중에게 맞아죽은 헌병 시체를 싸이카로 수원읍까지 실어 나르는 것도 보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것이 바로「제암리사건」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천주교가 3ㆍ1운동을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다고 공박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중 천주교신자는 하나도 없으니 그도 일리 있는 말이다. 더구나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민 아우스띠노 주교는 각 본당주임신부에게「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신자들에게 주지시키라」는 희랍을 발송, 주일마다 그것을 낭독케 했다.
나는 그때 열두 살이었는데 우리 본당 김원영 신부님께서 이 공문을 낭독하시는 것을 직접 들었다.『만세 부르지 말라』는 소리는 있어도 개개인까지『부르지 말라』는 소리는 들어있지 않았다.
신부님 말이라면 소금 섬을 바다로 끌라면 능히 끌 태세를 갖춘 공소회장이셨던 아버님과 어머님ㆍ삼촌ㆍ공소교우들은 횃불을 여기 저기 드높이 켜들고『대한독립만세』를 밤새도록 불렀다.
내 동생 기순(지금 전주교구 은퇴신부)이도 목청이 터져라 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 이튿날 목이 콱 쉬어가지고 학교에 갔다.가는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날 첫시간에 교과서를 들고 크게 읽으라는 담임선생님 명령대로 읽으려니 목은 쉬고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담임이셨던 이명진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그만! 잘했다 잘했어』하신다. 글은 하나도 못읽었는데『잘했다니…』- 어제밤에 만세 부른 것을 잘했다는 암시였다. 목이 쉰 걸 보시고…
1백3연간이나 계속됐던 박해를 이겨내고 조선천주교회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판국에 종교자유를 얻은 지 겨우 32년째 되는 해인 1919년 3ㆍ1운동 자체가 겁난 게아니고, 다시 그 지긋지긋한 박해가 또 폭풍우같이 들이닥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에서 『만세 부르지 말라』는 교시가 나왔을 것이다.
1887년 5월 30일 한ㆍ불수호조약이후 이 나라에 안겨진 종교자유로 간신히 대로를 활보하기 시작한 전교 신부들이 교우들과 같이 긴 한숨을 내쉬게 된 판국이니 말초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나는 만세사건이 터진 이듬해, 즉 1920년 9월 13일에 용산신학교에 입학했다.
소ㆍ대신학교 할 것 없이 만세의 바람에 가슴들이 부풀어 있었다. 공휴일이면 절세의 영웅걸사들이 열변을 토했다. 민족의 얼을 부르짖는 고함소리! 우리 신학교는 거의 치외법권처럼 취급돼 누구 하나 외부에서 간섭하는 자가 없으니 목소리들이 한없이 컸다.
우리 윗반인 노 대주교님 반에서는 김 베드로 피득, 최 마티, 우 요셉, 양 베드로, 기섭, 강 바오로 영걸 등이 열변가로 등장하고, 우리 반에서는 김 요셉 재명, 이 시몬, 윤 라우렌시오 을수, 박 요한(반장), 조 빈첸시오 인원, 홍 토마스, 유 요한 영근, 그리고 내가 연사로 등장했다.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목요일이면 동작이 별장 솔밭 속에서 열변을 토하면 삼천초목이 목 놓아 우는 듯 소슬바람에 온 솔밭이 뒤흔들렸다.
김 요셉 재명은 훤칠한 키에 어디서 그렇게 많은 시사상식을 알았는지 세상 일은 혼자 다 아는듯 했다. 동작리 솔밭에 우리들을 모아놓고 핏대를 올려가며 독립열사들이 상해로, 만주로 떠나며 부르던 「독립가」를 부르며 목메어 울기까지 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時運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간다 한들 영 갈소냐 나의 사랑한 반도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너와 작별한 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 때도 있을 지오 시베리아 만주들로 다닐 때도 있을지라.
나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있는지 너를 생각할 터이니
너도 나를 생각하라 나의 사람 한반도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이별할 때에는 빈주먹만 들 고가나
이후 성공하는 날엔 기를 들고올 것이니
악풍폭우심한 이때 부디부디 잘 있어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다다르고 히틀러는『모스크바』를 파죽지세로 쳐들어갔다.이때 과격파이며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 스탈린도 얼마나 급했던지『오! 나의조국 러시아의 수호자 하느님이시여 이내 조국을 구해주소서!』했고 『참 애국자는 종교인 속에 있다』고 외치기까지했다.
하물며 우리에게서야 어떠했으랴. 박말구 신부님반, 그위 최말구 신부님반 학생들은 지금 용산성당이 서있는 삼호성 산꼭대기까지 밤중에 뛰여나가 밤이 지새도록『만세』를 불렀다.
주동자는 김 베드로 영근 신부로 품을 받은 때였다. 신학교 규칙을 어기고 대침묵을 깼으며 무단탈출 했고 외부사람들과 어울렸다 해서 그 윗반과 그반이 1년간 성직정지처분을 받았다.
1년간 시골에서 푹 썩었지만 누구도『만세 불렀다』는 죄목은 내려지지 않았다.민 주교님이나 교장 신부님의『만세를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그동안 그만큼 한국교회에 많은 핍박이 가해졌다는 뜻인 것이다. 종교도 발붙일 고장이 필요하다(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