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만세운동이 팔도강산에 성난 파도와 같이 물결치고 한민족의 얼을 되찾으려고 남녀노소가 모두 발버둥 쳤다.
우리 교회도 이에 발맞춰 인권보호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으면 아니 됐다.
3ㆍ1운동 당시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던 종현(現 명동)성당의 민 아우구스띠노 덕효 주교님의 교서가 남으로 북으로 휘날렸다. 그 내용인즉 오늘까지의 전교신부들과 조선신부들의 행동거지, 특히 언어예절에 손색없이 대인관계를 새 문화의 추세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공문을 받는 날부터 「말투」를 백80도 바꾸라는 엄명이 내렸다.
1784년 3월 24일 베드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각계의 교우들을 불러 모으고 우리풍토에 맞는 전교를 하되, 하의상달식은 그 효과를 거두기가 거의 불가능하니 상의하달식으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자신들은 물론 10년 후에 이 땅에 오신 주문모 신부를 위시 1836년 1월 15일 불란서인으로 외방전교차 서울에 입성한 라(모방) 신부 등 1887년 5월 30일 한불수호조약이 비준된 이후까지 이 땅의 신부들은 일거수일투족이 양반계급의 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1919년 만세의 물결이, 이 민족의 뇌성같은 얼을 찾는 함성이 온 땅을 뒤덮자 교회도 눈을 아니 뜰 수 없었던 것이다.
제일 먼저 모든 신부들은 겸허하고 양순한 태도를 갖추며 「해라」「하게」등의 반말투를 싹 버리라는 지상명령이 내렸다. 내 경험에 따르면 만세운동이 벌어진 그때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 즉 갓등이 예수성심성당에서 10시 미사를 참례하고 나오니 넓은 성당마당에 멍석이며 거적ㆍ가마니들이 죽 깔려있지 않은가?
어린 소견에도 만세를 부르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어머니께 여쭈니 어머니는 『요녀석. 네가 알긴 뭘 안다고 조잘거리니!』하고 손으로 내 입을 막으셨다.
사제관 대청마루에는 김 아우구스띠노 원영 신부님이 앉으셨고 뜰아래에는 멍석이며 거적이 좁다할만큼 많은 교우들이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신부님! 노를 푸십시오! 저희들이 죽을 죄를 지었으니 화를 푸시고 다 용서해 주십시오』
교우들은 엉엉 흐느껴 울었다. 나도 남이 장에 간다니 덩달아 망건 쓰고 나선다고 어머니 곁에 꿇어앉아「아이고 아이고」소리를 질렀다.
『저희들이 뭘 잘못했기에「해라」를 하시던 신부님께서 갑자기 오늘 「하셨읍니까」라고 하십니까? 「안녕히 가십시오」가 다 뭡니까? 아주 정나미가 떨어져서 못 살겠읍니다』
민 주교님 교서를 받는 날부터 양반이 하인에게 하듯「해라」를 못하므로 김 신부님은 그 주일 강론부터『여러분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읍니다』하신 것이다.
교인 자신들을 가리켜 「죄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도록 한것도 모르고「죄인」을 용서하라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김 신부님은 간곡히 애원하셨다.『아무리 울부짖어도 지엄하신 민 주교님의 엄명이니 난들 어떻게 합니까? 나도 갑자기 언사를 바꾸려니 혀도 안 돌아가고 여러분과의 거리가 천만리는 떨어지는 것 같은 심정입니다.
우리 모두 그 뜻을 잘 알고 있으니 주교님께 순명합시다. 이제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신자들은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일어나 초상집 상주같이 엉엉 울면서 돌아갔다.
나도 30리나 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머니를 따라 울면서 돌아왔다.
그러나, 이런 명령에도 여전히 「해라」를 사용한 신부님이 계셨다. 20여 년이 흐른 뒤 강원도 이천군 포내본당의 베드로 부이수 손 신부님은 워낙 나이가 많아 입국했기 때문에 양반식의 말을 배워 깎듯이 「해라」를 쓰셨다. 민 주교님 교서에도 『나는 양반말 밖에 못한다. 너희들은 놀라지 말아라』하셨다.
그뿐인가. 어느 해 신부피정차 서울에 올라와 당시 드브렛 유 부주교와 명동 주교관 느티나무 밑을 거닐면서 『주교 너 밥 먹었니? 나도 밥 먹었다』하셨다는 것이다. 그 신부님 나름대로 깍듯이 대접한다는 것이 그리됐다. 신부사회에서 깔깔 웃는 소재가 됐다.
손 신부님이 이천군수를 만났을 때에도 역시 어김없는 「해라」였다고 노기남 윗반학생이 돌아와 전해서 또다시 앙천대소했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53년 5월 입국, 50년 6ㆍ25때 공산당에게 납치돼 중강진 땅에서 순교하신 방 빠뜨리치오 주교님은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한국에 전교신부로 파견돼 신의주 본당주임을 지내셨다. 신의주성당을 한ㆍ양 절충식으로 지으신 방 주교님은 신의주의 장날이면 장바닥에 나가 옥수수자루를 사서 뜯어먹어가며 다섯 살ㆍ여섯 살 난 아이들에게도 꼬박꼬박 『진지 잡수셨읍니까? 어머니 어디 계십니까?』존대를 했다.
옆에서 킥킥거리는 빈축도 산일이 있다고 홍용호 프란치스꼬(후에 평양교구 주교)가 개학하고 와선 신바람나게 줏어댔다. 그 얘기에 우리 모두 창자가 끊어져라 하고 웃었다.
새 바람따라 교우들에게 존댓말을 한 신부님 앞에 멍석위에 무릎 꿇고 앉아 벌을 기다리는 석고대죄(席藁待罪)했던 죄인들이나 끝내 「해라」를 고집하시다가 저승으로 가신 손 신부나 시대를 흘러가는 하나의 에피소드 속에 기억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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