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의 행정조직은 대략 다음과 같이 발전 하였다. 사도들은 선교사로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주요한 도시에 교회를 설립하고 거기에 장로들을 임명하여 그 지역교회를 사목하게 하였는데 장로단 중의 한 사람이 감독이 되어 장로단을 이끌고 그 지방교회를 다스리게 하였다. 차츰 사도들이 별세함에 따라서 이 감독이 사도의 직분을 맡게 되어서 오늘의 주교가 된 것이다.
개별교회들의 조직은 이렇게 한 주교가 여러 장로(신부)들과 부제들을 거느리고 그 교회의 사목에 임하였는데, 지방에 따라서 조직화가 일찍 정착한 곳도 있고 더 늦은 곳도 있었다. 중요 도시에서는 상당히 일찍부터 이러한 교계제도가 정착하였으니 1세기 말에는 이미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지에는 확고하게 교계제도가 성립되었다.
교회가 시골에까지 설립됨에 따라서 로마제국의 주(州)의 수도에 있는 교회는 시골교회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수도의 주교들은 대개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의 주교로서 말하자면 설립자사도의 직계 후계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그 주의 여러 교회들을 지도 감독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영향권 안에있는 교회들의 주교선거를 감독하고 주교서품식을 거행하고 관구회의를 주재하고 항소심 법관이 되었다.
2세기 초에는 이러한 모교회(母敎會)와 지교회(支敎會)의 연합체들이 출현하였으니 예루살렘 주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안티오키아 주교는 시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 주교는 이집트에서, 로마 주교는 이탈리아에서 모교회의 대주교 역할을 하고있었다.
예를 들면, 1세기 말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는 시라아 지방의 여섯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그 지방 주교들과 신자들을 교훈하고 있다.
이제 로마 교회의 사정을 살펴보자.
베드로의 최고 사목직은 베드로의 사후에도 교회 안에 영속될 성질의 것이므로 누구든지 베드로의 뒤를 이어 베드로가 사목하던 교회를 사목하는 주교가 교황인 것이다.
전고(前稿)에서 본 바와 같이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도회의(49년) 후에 안티오키아를 거쳐서 다시 로마에 갔다. 거기서 그는 제자 마르꼬와 함께 교회를 지도하였고 마르꼬는 스승의 설교를 재료로 하여 마르꼬 복음서를 편찬하였다.
오늘날 아무도 베드로의 친저성(親著性)을 의심하지않는 베드로 전서의 말미에는 『바빌론에 있는 여러분의 자매교회와 내가 아들로 여기는 마르꼬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I베드5ㆍ13) 하였는데 알려진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의 활동무대는 시리아의 해안지방과 로마이지 유프라데스 강변은 아니었으며, 바빌론은 요한 묵시록에도 보이는 것처럼 이교문화의 대명사인만큼, 당시 이교문명의 중심지인 로마를 상징적으로 바빌론이라 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는 로마에서 소아시아 지방에 보낸 편지이다.
1세기 말에 이냐시오는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죄인인 고로 베드로와 바울로처럼 당신들에게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하면서 로마와 베드로와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베드로의 3대 계승자 글레멘스는 꼬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베드로와 바울로가 로마에서 선교하고 순교하였음을 강조하고있다.
2세기 초에 빠삐아스는 로마사람들의 요청에 의하여 베드로의 로마에서의 설교 내용을 그의 제자인 마르꼬가 저술한 것이 마르꼬 복음서라 하였고, 이 사실은 이레네오, 떼르뚤리아노,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도 확인하고 있다.
2세기 말경에 로마에 있던 사제 가이요는 바티깐 언덕과 오스띠나가로 옆에 있는 베드로의 무덤과 바울로의 무덤을 보여 주겠다고 이단자들에게 말하고 있고, 같은 시기에 꼬린토의 디오니시오가 로마기에 꼬린토의 디오니시오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도 베드로와 바울로가 너희 로마인들을 교육하였고 거기서 순교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1915~1916년 발굴에 의하면, 성 세바스띠안 대성전 옆의 까따꿈바(지하묘지)의 벽에 2백개 이상의 글씨가「베드로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고 쓰여있었으며, 최근에 베드로 대성전 지하 발굴조사에서 그 장소가 베드로의 무덤이 아니라면 적어도 베드로를 공경하는 특별한 장소였음이 확인되었다.
이상의 여러 가지 문헌과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여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사목하였고 순교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베드로가 끌라우디오 황제 치세 초에 로마에 처음 갔으니(44년) 적어도 20년이상 로마 교회를 사목하였다.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64또는 67년) 후로부터 약 20년간의 사정은 알려져있지 않지만 이레네오의 증언에 의하면 베드로 다음에 리노, 그리고 아나글레또, 글레멘스, 에바리스또, 알렉산데르의 순으로 로마 주교들이 계승하고있다.
같은 시기에 헤게시뽀는 정통교리를 확인하기 위하여 여러 중요한 교회의 주교계보를 조사하였는데, 로마에 와서 베드로의 10대 후계자 아니체또까지 확인할 수 있었고 아니체또 다음에는 소떼르, 그 다음에는 엘레우테로가 계승하였다고 증언한 것을 교회사가 에우세비오(265~340)가 그의 교회사 4권에 수록하였다.
2백년경에 떼르뚤리아노는 중요한 교회마다 어떤 사도에게까지 연결되는 주교들의 계보를 가지고 있으며, 로마의 글렌멘스는 사도 베드로에게 연결된다고 증언하고 있다.
3세기 이후에 모든문헌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베드로의 교좌(敎座)」라는 용어는 로마 교회라는 말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되고있다.
이렇게 로마 교회는 수석사도 베드로의 후광을 입고 온갖 박해와 곤란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찍부터 교회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로마의 주교는 로마지역의 교회들만이 아니고 다른 지역의 교회의 중요한 사정에도 개입하여 지도하고 있었다.
한편 교계제도도 일찍부터 단일 지도체제로 확립되었고 교세도 급속히 신장하였다. 3세기 중엽의 꼬르넬리오 교황의 서간에 의하면, 그 당시 로마 교회에는 사제 46명, 부제 7명, 차부제 7명, 시종자 42명, 그 이하의 성직자 52명이 있었고, 교회의 도움을 받는 과부와 빈자들이 1천5백명 이상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종교의 자유를 얻기 전에 로마교회와 그 주교는 이미 전체 교회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