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본바와 같이 베드로가 사도단의 단장으로서 다른 사도들보다 더 큰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후계자들도 자기지방만 사목한 것이 아니고, 다른 주교들이 책임지고 있는 교회의 중요한 사건에도 지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후세에 교황의 보편적 권위를 수위권(Primatus)이라고 부른다.
리노, 아나글레또의 후임 교황인 로마의 글레멘스의 위신은 1세기말에 이미 전체 교회에서 인정하는 것이었다.
희랍반도의 항구도시 꼬린토의 교회는 설립 당시부터 유대인 신자들과 비유대인 신자들의 혼성교회로서 교리상의 논쟁과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관습상의 차이로 분쟁이 여러 번 일어나서 바울로 사도를 애먹인 교회인데, 90년경에는 분쟁이 재연하여 몇몇 성직자들을 추방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 소식이 멀리 로마에까지 전해지자 글레멘스는 96년경에 꼬린토에 편지를 보내어 이 사건에 개입하였다. 그는 이 편지에서, 교회는 평화와 일치의 공동체이며, 교계제도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하여 제정된 것이므로 신자들이 성직자를 추방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라고 책망하였고, 만일 누가 그리스도께서 내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이 편지에 불복한다면 그는 크게 잘못하고 위험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은근히 자기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이 사건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편지는 1세기 말에 이미 로마 주교의 권위가 어떠하였는가를 잘 알려준다. 더욱이 코린토에서 가까운 에페소에는 요한 사도가 살아계셨고, 이 편지는 그 후 70년 동안이나 이 지방에서 성서처럼 존경을 받았음을 감안할 때에 로마 주교의 위치를 가히 알만하다.
위에 말한 이냐시오는 시리아 지방의 주교들에게는 상위자(上位者)로서 말하였지만, 로마 교회에 보낸 서간에서는 로마 교회의 뛰어난 지위를 찬양하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는 로마 교회를 수석(praesidet)교회라 부르고 있다.
이레네오는 2세기에 그의 저서「반이단론」3권에서 사도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로마교회의 중요성 때문에 모든 교회들은 로마 교회와 일치해야(convenire)된다고 역설하면서, 사도적 전통의 보루인 로마 교회의 주교들의 계보를 베드로에서 알렉산드르까지 열거하고 있다.
같은 시대에 제14대 교황 빅또르(189~198)는 에페소의 주교가 부활축일을 언제 지내는가하는 문제로 로마와 대립하였을 때에,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 회의가 로마와 같은 날에 부활축일을 지내도록 의결하라고 명령하였고, 주교들은 지시대로 하였다.(논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3세기에 북아프리카에서, 배교자가 다시 교회에 들어오려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고, 유명한 치프리아노 주교까지 이에 가담하자, 18대 교황 스떼파노 1세는 치프리아노에게 서간을 보내어 회두하는 배교자의 재세례를 금하였고, 소아시아 지방에도 같은 지시를 보내서 세례를 다시 받는 폐단을 시정하였다.
교통이 불편하고 교회가 국가의 박해를 받던 초기 교회의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은, 로마 교회의 교세나 정치적 위치에서 우러나오는 권위나 권력의 결과가 아니고, 순전히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라는 교리적 확신과 공감에서 유래된 것임을 말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신학활동은 주로 동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따라서 많은 이단설도 동방에서 발생하여 혼란을 야기하였지만, 그러한 이단성을 주창한 마르치온이나 몬타누스나 영지주의의 지도자들도 자기네의 주장을 변명하기 위하여 멀리 로마 교황에게 호소하였고, 정통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반대파의 박해나 비난을 받으면 의례히 로마 교황의 보호를 요청하거나 로마에 피신하였다. 그만큼 로마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지주(支柱)였던 것이다.
물론 초대 교회에 있어서 교황권의 행사는 법률적으로 확립된 수위권(首位權)행사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교황들이 수위권을 행사했고 또 그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박해가 끝나고 교회가 자유를 쟁취한 4세기부터는 사정이 더 복잡해진다. 콘스탄티노 황제는 도나투스 이단파와 아리우스 이단파의 소동으로 여러 지방의 교회 간에 불화가 조성되자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소집했는데, 거기서 니케아 신경(信經)을 결의한 후에 로마 주교가 이탈리아에서 총대주교 역할을 하는 것처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다른 주의 수도 대주교들도 그 지역에서 총대주교역할을 하는 오랜 관습을 인준하였다.
콘스탄티노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리스로 옮긴(330년) 후부터 종교적 영역에서 로마 교황의 비중은 더 커졌지만, 황제의 위세를 업고 있는 콘스탄티노플리스의 주교의 세력이 커지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에서(381년) 로마 다음으로 중요한 주교좌로 인정받았고, 그 후 여러 번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였다.(결국 1054년에 로마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다마소 1세 교황은(366~384) 이 공의회의 교리는 승인하면서도 결의된 법률사항은 인준을 받기 위하여 로마에 제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고 전체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였다. 다음 교황 시칠리오(384~399)와 인노첸시오 1세(402~417)도 카르타고 회의와 밀레비타노 회의에 대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약화되고 훈족과 반달족의 침략에서 로마를 구출한 레오 1세 교황(404~461)의 명망은 높아졌고 교황의 수위권은 확고해졌다. 칼케돈 공의회는(451년) 그에게『우리 모든이를 위하여 당신은 성 베드로의 해설자였고…우리 참석자 5백20명 주교들은 머리가 지체를 지도하듯이 당신이 지도하셨다』고 편지하고 있다.
5세기 초에 아우구스띠노는 신앙의 정통성은 로마 성좌의 신앙과의 일치에 있고, 교회일치의 근본은 베드로의 주교권이 면면히 계속된 로마 성좌와의 일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5세기에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이 교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확립되었으며 그 후 시대에 따라서 수위권 행사에는 많은 기복이 있었으나 원칙은 변함이 없었고 마태오 복음 16장 18절은 무수히 인용되고 주석되었다.(중세 이후 현대에 이르는 교황권의 문제는 다른분들이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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