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일찍이『교육을 받지 않는 것은 태어나지 않으니만 못하다. 왜냐하면 무식은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이다』라고 갈파했다.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을 앞두고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1백3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박해를 받았다. 자다가도 남부대여하고 산골로, 토굴 속으로, 벌판으로, 가시덤불 속으로 짐승처럼 도망 다녔다.「오늘은 경기도, 내일은 충청도」하면서 저주와 학살의 제물이 돼도 오로지 하느님향한 믿음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가 얼마며, 또 그들을 돌보고 가르친 사람이 있었을까? 대명천지 너른 땅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가련한 어린 삶들이었다.
1백3년 3대를 겪는 동안 부모 없이 글공부는 헛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해 때 박 마르꼬 동헌ㆍ박 이시도르 희봉 신부 집안과 황 요셉 정수 신부ㆍ황 주교와 아우꾸스띠노 신부 집안, 윤 바오로 의병 신부와 윤 마태오 형중 신부 집안과 신 요셉 인균 신부 집안, 오 요셉 기선ㆍ알베르또 기순 신부 집안 등 다섯 집안들이 똘똘 뭉쳐 죽으나 사나 병인박해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어떤 때는 일 년에 네 차례씩 도망을 다녔단다. 나중에는 깨진 쪽박 하나 아니 남았단다.
박해가 뜸할 때 아버님은 산에 삭정이를 주우러 가셨다가 글이 하도 배우고 싶어서 언덕진 벼랑에서 싸리나무를 잘라 붓 삼아「가갸거겨」를 쓰고 지우곤 하셨단다. 종이 살 돈도 없고 붓 살 돈도 없어 그렇게 한글을 배우신 아버님께서는 한문은 등 너머로 배우셨다.
끔찍하던 박해의 그림자는 걷히고 1887년 한불수호조약이 비준되자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신앙의 자유와 교육의 자유가 주어졌던 것이다. 배움의 자유, 가르침의 자유가….
서당에 자식을 떳떳이 보낼 수 있게 된 부모님들은 눈코 뜰 새 없이 자식들을 가르치고 배우고 익혔다. 천주학생이 자식무식하다 소리 아니 듣도록.
종교자유를 얻자 각 본당에서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서당ㆍ의숙ㆍ학원ㆍ학교 등을 발전시켜가며 배움의 전당을 마련했다.
명동에「종현서당」, 약현에「가명의숙」, 평양에「기명의숙 (후에 기명학교)」, 수원(화성군)봉담면 갓등이성당에「삼덕의숙」,강원도 풍수원에「성삼학교」 등이 손꼽힌다.
70년 전만 해도 무조건 교우자녀는 성당의 서당이나 의숙에 보내야 했다.
만일 자녀를 아니 보내면 부모의 성사를 막기까지 했다.
못 가르친 원한을 풀려는 뜻도 있었고, 한편으로는「나무는 어릴 때부터 휘어잡아야 한다」는 원리에 부합시켜『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명백히 깨우치고, 지긋이 실행할 것』이 다섯 가지 인격을 이루는 교육내지 수양의 안목이라고 일러온「中鏞」대로 가르치려는 뜻도 있었다.
여기에 신앙교육에 필요한 교리교육을 중심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집중시켰다.
유럽에서 수도원ㆍ교회중심으로 교육했던 것을 본뜬 셈이다.
내 본당인 갓등이성당 김원영 신부는 30명이나 신학교에 보냈어도 다 도중하차하고 나 하나만 성공했다고 여간 만족하신 게 아니었다.
『그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어쩌다 그 미련한 놈,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옆에 계셨던 박 마르꼬 동헌 학사님께 넌지시 물었다.
『학사님. 어떻게 된 사연입니까? 왜 저렇게 마당에 석고 대죄하는 겁니까? 사람이라도 죽였나요?』
박 마르꼬 학사님은 엎드린 이가 회장인데, 그 아들이 신명의숙(성당 학교)을 졸업하고 서울 배재중학교에 공부하러 갔다고 본당신부가 야단이 났다는 것이다. 집안 식구들에게 파문벌을 주셔서 회장이 그것을 풀어달라고 눈물 콧물 흘리며 용서를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신부님은 그 아들을 중도퇴학을 시켜 이 자리에 같이 꿇어앉히기 전에는 결코 풀어줄 수 없다고 하셨고, 빌고 빌어서 손이 발이 되고 발이 손이 되도록 빌었지만 막무가내였다.
마침내는 회장 입에서 『그만두슈! 입학시키기도 하늘의 별따기 같은 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고 공부 잘하는 자식을 퇴학시키라니… 저런 꼭막힌 신부 같으니!』하는 소리가 나왔고, 회장은 일어나 가버리고 말았다.
김 신부님이 그렇게 강경했던 이유는 천주교 집안의 자식을 개신교가 운영하는 학교에 보내면 대죄였기 때문이었다. 또 그렇게 가르쳐놓으면 다 냉담 한다고 서슬이 시퍼래서 마룻장을 구른 것이다.
『내일 내가 죽는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리라』는 스피노자의 이상과 얼마나 동떨어진 이야기인가.
설사 많이 배워 냉담하더라도 나중에 짚고 일어서 회개할 수 있는 지팡이를 그 마음에 만들어주는게 아니겠는가.
그때 말썽이 됐던 주인공인 내 동기동창은 배재학교를 나와 일정시대에는 그곳 면장까지 지내면서 일제의 온갖 탄압 속에서도 교회 일에 앞장섰고 자기본당을 수호했으며 씩씩한 일꾼으로 오늘도 내일도 교회의 지팡이 노릇을 하고 있다. 옛 이야기를 기쁘게 해가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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