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본당신부님이 내리신 푸짐한 점심을 먹었는데 박 신부님과 두 부제ㆍ오연희 동창생도 함께 했다.
식사를 끝내고 그분은『자! 우리 성모님이 승천하신 날이니 그 아들인 김대건 신부님 산소에 참배 가십시다』하시면서 먼저 서두르신다.
성당을 떠나 김 신부님 묘소로 가는 동안 이빈첸시오 할아버지 옆에 찰싹 붙어 따라가며 대화의 광장을 열었다.
92세 노인과 14세 소년-78년 차이가 나니 하늘과 땅 사이만큼 까마득한 세대차이다.
『할아버지、몇 살 때 김 신부님 시신을 새남터에서 업고 오셨어요?』
『그때 내가 열일곱 살이었지. 옛날에는 열다섯이면 호패를 찼고 전쟁에 나갔단다. 곧이 안 들리지?』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할아버지、그럼 누구하고 같이 가셨어요?』
『누구하고 라니? 유다같은 녀석들 때문에 혼자하기도 가슴이 떨렸는데 누구하고 같이가? 나 혼자했어. 이 할아비가 그때 기운깨나 썼지.』
『유다같은 사람이 그렇게 많았나요?』
『그럼. 저 기해년 박해를 봐라. 범 주교님、나 신부님、정 신부님 할 것 없이 그때 회장들과 교회 우두머리 교우 2백여 명이 거의 김여상의 유다노름에 순교하셨지 않은가. 살얼음판이었지. 그놈이 주교와 신부님들을 피신시킨 수원 군상리(지금의 화성군 조암리)까지 포졸을 데리고 내려가 나라에서 성교(천주교)를 허용했다고 주교와 신부님을 모셔오란다고 해서 이렇게 내려왔다고 거짓말을 했지. 그래서 이 땅의 성직자를 한 명도 남김없이 쓸어버린 거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지금도…』
『그럼 혼자서 어떻게 하셨어요?』
『1846년 9월 16일에 우리 김 신부님이 순교하시는걸 지켜보고 난 뒤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시체를 모래로 슬쩍 덮어놓고 주야로 지켰단다』
『아이구、저런. 전 지금도 떨리네요』
『그럴 게다. 10월 26일에야 경계가 뜸해졌지. 난 40여일을 근방을 빙빙 돌며 숨어서 엿보았지. 그러다가 그날 밤 머리는 가슴에 안아 모시고 시체는 둘러업고 야밤으로만 미리내를 향해 달렸다』
『날이 밝았을 때에는 어떻게 하셨나요?』
『낮에는 산 속에 숨었지. 김 신부님 시체는 솔가지를 쳐서 덮어놓고 난 그 옆에서 매괴신공(지금 묵주의 기도)을 몇 백 번이나 드렸는지 모른단다.「성모님. 순교한 당신 아드님의 시체를 미리내까지 고이 모셔가도록、무사히 들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하고. 그래도 가슴이 두 근 반 세근 반 했지. 못된 놈이라도 나타날까봐서…자기도 못 믿는 판국에 남과 같이 시신을 운반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어.』
『그럼 오는 데 아무 일 없었나요?』
『말도 마라. 몇 번이나 간이 떨어질 뻔 했다고. 그게 사람이 할 일이냐? 천주 성모님이 날 시켜 하신 거지.』
자꾸만 계속되는 2㎞의 길을 걸으며 나는 이 빈첸시오 할아버지께 꼬치꼬치 여쭈어보았다. 이 할아버지는 제법 구수하게 유모어를 구사하였다.『남곡리 양지에서 미리내까지 오려면 신덕ㆍ망덕ㆍ애덕의 세 고개가 있지.
박해를 피해오던 신자들이 삼덕을 가슴에 기리며 넘나든 곳이지. 나도 신덕ㆍ망덕고개는 잘 빠져 넘었는데 애덕고개를 넘으려니까 날이 밝지 않겠나.
저 비탈 콩밭 오른쪽 밭고랑에 김 신부님 시체를 숨겨놓고 솔가지를 쳐서 여러 겹으로 덮고 보니 해가 점점 높아지지 뭐냐』
해가 높아지자 콩밭의 임자가 일꾼들을 데리고 올라와 가을걷이를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고개를 넘어가 소나무 밑에 배를 쭉 깔고 숨어서 눈만 내놓고 망을 보았다.
그런데 콩을 거두는 일꾼들이 점점 시체 숨겨둔 곳 가까이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이 할아버지의 가슴이 졸아들었다.
몇 번인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드렸던 묵주신공이지만 더욱 정성껏 드리기 시작했다. 『제 목숨을 대신 드려도 좋으니 우리의 착한 목자 김 신부님 장례나 잘 치르게 해주십시오. 저걸 보세요. 이제 두서너 고랑만 더 베어 들어오면 만사는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성모님 기적을 내려주십시오』
온갖 생각이 주마등같이 스쳐가면서 사람들이 콩밭을 계속 베어 들어오고 있었다. 김 신부님 시체를 감춰둔 곳에 거의 다 다가왔을 때 갑자기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동서남북에서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천둥과 벼락이 울었다.
그러자 콩밭임자가『여보게들 내려가세. 다음에 날씨 좋을 때 와서 거두세.』하는 것이 아닌가 콩밭주인이 일꾼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날이 개었다.
『그래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김 신부님 시체를 등에 업고 미리내까지 달려왔지』
이 할아버지는 『신부님、얼른 내려갑시다. 조금만 가면돼요. 성모님께서 신부님을 마지막까지 봐주셨지 뭡니까.
신부님、천당에서도 성모님께 감사드려야해요』하고 신부님께 말씀드렸다면서 눈물을 닦으셨다.
75년 전의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지금의 얘기처럼 실감나게 들려주셨다.
이 빈첸시오 할아버지의 결심으로 밝은 낮에 순교자로 미리내까지 금의환향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계속 김 신부님의 산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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