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노인과 14세 학동사이에 75년 전 벌어진 옛날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김 안드레아 대건 신부의 산소에 당도했다.
『저쪽으로 애덕고개가 보이?』
오른쪽을 가리키시는 이민식 할아버지는 애덕고개에서 단걸음에 김 신부님의 시신을 업고 당신의 종가산으로 직행하셨단다.
『김 신부님의 산소를 쓴 산이 우리 종가산이어서 잘 알고 있었지. 초가삼간으로 산지기 집 한 채가 있었거든. 김 신부님 시신을 업고 그 초가집에 들어가 헛간으로 갔지. 마침 헛간에는 보릿짚이 꽉 차있지 뭐냐. 유다스들의 눈이 무서워서 보릿짚 속에 시신을 단단히 숨기고 나와서 망을 보았단다. 혹시 누군가 보지 않았나 해서.』
할아버지는 옛날을 회상하시며 말을 이으셨다.
『시신을 묻을 구덩이(광중)를 파는 데 꼭 밤에만 혼자서 팠단다. 일꾼으로 남을 부르면 탄로가 날까 해서. 파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 보릿짚으로 덮어두고 밤이 되면 짚단을 헤쳐 광중을 파고해서 1846년 10월 30일 밤에야 김 신부님 시신을 광중에 모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서『관도 할아버지가 짜셨나요?』
『그 판국에 관이 다 뭐냐? 시신을 광중에 모시고 내 광중에 홍대만 우리 집에 있는 널판을 구해다가 톱으로 잘라서 7개 홍대만 엎어드렸지.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이 할아버지는 달구질과 묘의 봉분성토도 혼자하시고 지석을 만들어 넣기도 하셨단다. 『암만 해도 세상이 좋아져서 우리 후손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으면 김 신부의 유해를 찾으실 것 같아서 홍대 위에 조선회를 꼭꼭 다져얹은 다음 내 손가락으로<金海 金公 大建 神父之墓>획을 꼭꼭 눌러서 음각으로 글씨를 새기고 그 위에 고운 참숯가루를 글자 획을 따라 넣었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글자 하나하나를 꼭꼭 다진 다음 고운 흙으로 덮었지. 훗날 산소를 발굴할 때에 글자가 이그러질까봐서.』
이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니 김 신부님의 묘소봉분이 새빨갛기만 했다『그런데、할아버지. 봉분이 왜 저렇게 빨개요? 떼가 하나도 없어보여요』
이민식 할아버지는 내 질문에「다 이유가 있다」시면서 대답해주셨다.
『1846년 10월 30일 김 신부님의 묘를 마련한 뒤 오늘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뱅이(墨里) 우리 집에서부터 참배하러왔지. 올적마다 산소를 돌보는데、이곳에서 30리 안에 사는 사람들은 교인이건 외인이건 어디가 아프다 하면 김 신부님 묘소의 봉분 잔디를 뜯어다 달여 먹으면 백발백중 낫는다나. 그래서 지금까지 잔디가 자랄 새가 없어서 저렇게 빨갛게 되어버렸단다』
이어 할아버지는 신부님 묘를 발굴한 때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세월이 흐르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뒤인 1901년 5월 21일、즉 김 신부님 시신을 모신지 55년이 지났을 때 부주교 빅또르 뽀아넬 박 신부님을 위원장으로、플로리아노 드망즈 안세화 신부님이 그 비서로 내려와 묘를 발굴했다.
5월 18일 서울을 출발、하우현성당에서 하루 주무시고 19일에 미리내에 당도했으나 비가 내려 21일에야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이민식 할아버지는 고증인으로 호출되어 성경을 잡고 맹세한 뒤 김 신부님 시신을 옮긴 이야기며 묘소 만들었던 이야기를 소상히 보고했다.
발굴하고 보니 내 광중에 흙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홍대가 조금 상했을 뿐 55년이 지난 그날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홍대를 드러내자 유해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해는 하나도 상하지 않았고 칡넝쿨이 유해를 뺑둘러 감아줘서 뼈 하나도 흩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천주님이 칡넝쿨로 관을 해주셨나봐』이민식 할아버지는 감개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해의 발굴은 우리 순교자를 복자품에 올리기 위해 유해를 발굴해야 한다는 교회법에 따른 것으로、뽀아넬 위원장이 뼈 하나의 이름을 부르면 드망즈 신부가 창호지에 그 뼈를 싸고 번호를 매긴 다음 조사서에 뼈의 번호와 이름을 적었단다.
번호를 매긴 유해종이는 순서대로 나무함에 담고 사방으로 민 주교님의 납인을 찍어 봉한 다음 서울 용산신학교로 모셔왔단다. 용산신학교 제1성당 제대를 향한 우편 구석 땅에 AㆍK字와 빨마가지를、그 아래 1821~1846이라고 새겨 덮었단다.
김 신부님의 시신을 모신 이 빈첸시오 민식 할아버지는 필자를 만난 그 해인 1921년 12월 9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25년 7월 5일 김대건 신부님은 복자품에 오르셨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 거듭 들려주어라. 집에 있을 때에도 길을 갈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일어날 때에도 항상 말해주어라』(신명기 6ㆍ4~7)
이 말씀에 따라 이민식 할아버지의 숨은 공덕을 나는 전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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