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3ㆍ1운동 바로 이듬해인 1920년 9월 13일 용산신학교에 입학하고 내일 모레면 신부님이 되신다는 부제님들을 바라보니 까마득하기만 했다.
『난 언제 저런 부제、그리고 신부가 되나』하고.
당시 신품성사를 받기위해 9월 14일 부터 18일까지 마지막 피정에 들어간 분들은 최종철(마르꼬ㆍ약현출신)ㆍ신인식(마르꼬ㆍ現 서산군 쇠기리출신)ㆍ윤의병(바오로ㆍ안성출신)ㆍ신성우(마르꼬ㆍ화천 태생、풍수원 출신)ㆍ김유용(필립보ㆍ가평태생 풍수원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수염이 제법 드리워졌고、준엄한 이상에 성덕이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듯하였다. 까만 수단에 옆으로 빗겨 쓴 베레모 반짝반짝 파리라도 미끄러질듯 한 깃또구두에 어느 세상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일류신사들이었다.
마지막 피정에 들어가신 다섯 분 중에 최 마르꼬 부제는 간신히 그 기회에 신품을 받게 되었다.
최 마르꼬 부제는 피골이 상접하고 창백한 얼굴에 키만 껑충한데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철학과 시작 때부터 폐결핵을 앓았던 것이다. 60년 전에는 폐결핵에 걸렸다하면 불귀의 객이 될 만큼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늘 쿨룩쿨룩 기침을 하면 왈칵 피를 토했다. 하다 하다못해 민간요법을 다 써봐도 효과가 별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죽림동(당시 약현)성당 아래 본가로 치료차 귀가하기 몇 차례였는지 모른다.
그러니 공부도 하다 말다 했을 텐데 그 해에 신품성사를 받게 된 것이다.
최 마르꼬 부제님의 이야기를 매주 목요일과 주일 오후에 산책으로 외출할적마다 사랑해주시던 박동헌 5품 차부제로 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대구가 분리되기 전의 조선교구 부주교가 바로 최종철 마르꼬 부제님의 본당신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정까밀로 두세(RㆍCamil Doucet) 신부님으로、8대 교구장 민 주교님이 절대 신임하셔서 그분이 자갈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들을 만큼 억센 신부였다. 1876년 비밀히 입국、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언덕(약현 마루턱=현 중림동)을 매입하여 순교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성요셉성당」을 한국 최초로 세우셨다.
그런 정 신부님인 만큼 자기 본당출신으로 처음 신부 한 분을 배출시켜 보겠다는 웅지로 최 부제를 밀어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배경이 튼튼한(?) 최마르꼬 신학생은 교장신부의 특허로 밤이 지새도록 미사비엘 성모동굴 앞에서 두 손 모아 빌며 성모마리아께 서원했다.
박 차부제님 말씀을 빌면 그 기도내용은『원죄 없으신 성모어머니、내 어머니시여. 베르나뎃다에게 열 여덟 번이나 나타나셔서 맨땅을 파고 샘물이 솟게 하여 만인의 육신영혼의 병을 치유해주시는 어머님. 이 아들을 보십시오. 다 죽게 됐습니다. 치료약도 없고 이대로 두면 이 아들은 신부가 못되고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제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오늘부터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묵주의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다 죽게 된 저를 완쾌시켜 신부가 되게 해주시면 성모님께 성당을 지어드리겠습니다』하고 빌었다는 것이다.
고린 동전 한 푼 없는 철학도가 성모님께 성당을 지어 봉헌하겠다는 이 굉장한 이상! 거미줄로 달을 꽁꽁 묶어 놓겠다는 얘기만큼이나 공상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듯이 최마르꼬 신학생의 끈기 있는 정성을 성모님은 굽어 살피시어 병이 정말 씻은 듯이 말끔하게 나았다고 했다.
말씀 끝에 박 차부제님은『너도 신학생 때나 신부가 된 다음이나 마찬가지로 성모님을 잘 공경해라. 묵주를 가지고…』하고 말씀하셨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최 마르꼬 부제를 포함한 다섯 분의 부제는 9월 18일 사제로 영원한 탁덕 아론의 품위에 올랐다. 그리고 최 마르꼬 신부는 1921년 6월 28일 공주읍 성당 주임신부로 임명돼 공주에 부임하자마자 신학생시절에 성모님께 서원한 성당 봉헌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15년 동안 안간힘을 다했다. 교우가 하는 금광(金鑛)에 주머닛돈을 톡톡 털어 가만히 투자하면서「일이 성공하면 성모님께 봉헌할 성당을 지어드릴 수 있다」는 일념으로 정성을 기울이기도 했단다.
1936년 공주읍 한복판 본동(속칭 강경골) 언덕 위에 붉은 벽돌에 푸른 벽돌을 섞어 성전을 지은 뒤 성모님께 봉헌、「성모성탄성당」으로 삼았다.
자신이 성모님 덕택으로 건강하게 새로 태어난 고마움에 신부가 되고 주임으로 임명되자마자 성모님께 한 서원을 실천했던 것이다.
1937년 성모성월의 12일 원 아드리아노 라리보 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면서 2층 사제관ㆍ단층 수녀원까지 축성되는 영광을 최 신부님은 받았다. 최 신부는 제대 앞에 꿇어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리면서『나의 어머님、성모 마리아여! 서원한대로 드리는 이 화환을 받으소서』하고 성모님께 화환을 씌워 드렸다.
대전본당 재직 시 나는 최 신부가 눈물을 흘려가며 들려주신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께 종부성사를 주고 난 후였다.
최 신부는 1945년 11월 25일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께 최후의 성사를 드리고 비화를 직접 들은 나는 일주일 후 임종과 장례미사를 집전해드렸다.
최 마르꼬 신부의 묘소는 김바오로 동욱(현 대전 유천동본당 주임) 신부님의 배려로 사제관 뜨락에 모셔졌고、그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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