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섭은 어느덧 아내의 흐느낌、그 신비한 음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점차 그 음률은 그의 머릿속과 온 몸 안을 뜨겁게 흐르며 춤추는 강한 기운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음률은 그의 내부에서 심장의 박동과 충동하고 부추기고 화합하여 끊임없이 몸 밖으로 분출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흐느낌、그 신비한 음률의 강한 자극으로 드디어 쾌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신비한 음률의 강한 자극으로 드디어 쾌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순간 온몸의 긴장과 기운이 어디론가 잦아지고 말았다. 기섭의 오관을 통제하며 뜨겁게 관통하던 신비한 음률이 그만 멎어 버린 것이었다. 아내가 흐느낌을 그치고 적의의 눈빛으로 겨누어 보는 것을 그는 알아차린 것이었다.
아내는 증오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경멸의 빛이 야릇한 비웃음으로 무늬지는 얼굴이었다. 고통의 무놀짐 속에서 호소와 원망이 자맥질하는 얼굴은 진작에 아니었다. 이제는 다만 체념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는 마지막 형상이었다.
기섭은 또다시 예리하게 덤벼드는 혼탁한 슬픔에 몸을 떨었다. 자기모멸과 자학이 시퍼런 칼날처럼 번득이는、정녕 혼탁한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시초하고 결과한 일이었다. 자기모멸과 자학의 선명한 실제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 또 한 차례 밤의 혼돈을 야기한 것이었다.
기섭은 종당에도 자기모멸과 자학의 선명한 실제를 희구하고 결과에 버린 자신이 그지없이 서글펐다. 아내에게 마지막 밤에도 고통과 체념을 안겨 주면서까지、그것에서 야릇한 희열도 취하며 끝내 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그지없이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또 하나의 농밀한 자기 모멸감이었다. 기섭은 끈끈한 슬픔 속에서 결국 또 한 차례 자신이 실패하였음을 확연히 인지하였다. 자기모멸감 만큼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새롭게 의지를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섭은 체념하였다. 방 안에 가득한 희뿌연한 안개 속 구석구석에서 밤의 혼돈에 대한 당위(當爲)들이 시뻘겋게 불을 켜고 난무하는 것도 같았다.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불꽃들이었다.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었다. 자신을 학대하고 아내를 괴롭히는 혼돈의 밤들은 얼마 동안이나、또한 몇 번이나 되풀이 되어 온 것인가…그리고 그것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기섭이 아내와 처음 삶을 시작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낳고 살던 몇 년 동안은 흉내도 내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러나 기섭은 곧 그 혼돈의 기억에서 돌아와 버렸다. 아리고 아픈 근원(根源)의 안개 속으로 그는 빠져들려다가 그만 떨치고、그리고 그 밤으로부터 돌아와 버린 것이다.
매연의 내음이 섞인 바람을 계속 불러들이며 차는 김포가도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기섭은 눈을 뜨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도 정다운 풍경들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자신과는 철저히 무관하게만 느껴지고、그리고 까닭 모를 적의마저 가슴 속에서 날을 세우는 것 같았다.
기섭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때 그는、이번에는 희뿌연한 안개 속에서 싸늘한 안개 자락을 제치며 빠끔히 나타나는 여자… 그녀가 뱀뙈뙈리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10년 전 월남에서 돌아오던 날의 부산항 제3부두의 장관이 눈앞에 알싸하게 떠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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