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탁덕,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 신부의 업적 전반을 연구고찰한 논문이 발표돼 학계와 교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최근 교회사가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ㆍ사학박사)에 의해 발표된「최양업 신부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은 어려운 시기에 12년동안 복음의 씨를 뿌리다 순사한 최양업 신부의 숨겨진 생애와 업적 등을 새로운 시야로 논하는 한편 그가 남긴 이 땅 교회의 기름진 문화유산,「천주가사」에 담긴 한국사상적인 맥을 폭넓은 관점에서 재조명, 그 가치를 확실하게 펼쳐 보임으로써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본보는 포교활동 및 사목생활에서 나타나고있는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사상을 비롯, 한국 국문학사에 있어 그 가치가 돋보이고 있는「천주가사」등을 고찰한 김옥희 수녀의 연구논문을 통해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고 또 강조되지도 않았던 최양업 신부의 위대한 삶을 밝혀본다.
최근 시성의 기운으로 한국교회사에 찬란한 샛별로 다시금 사제 김대건 신부가 무섭게 타오르는 활화산이라면 최양업 신부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로 비유될 수 있다.
김대건 신부가 짧았으나 뜨거운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면 최양업 신부는 꺼지지않는 생명력으로 잠자는 이 민족의 신심을 일깨운 선각자라 말할 수 있다. 13세의 어린나이로 김대건ㆍ최방지거(프란치스꼬) 어린이와 함께 한국최초 유학생이자 신학생으로 선택돼 마카오 땅으로 떠났던 최양업 신부.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 한국인 사제로 불림 받았던 그를 김옥희 수녀는 뛰어난 성덕과 지도력으로 이 땅이 민족의 신앙을 일깨운 탁덕의 표본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짧았던 생애를 통해 최 신부는 서민대중을 교화시킴으로써 평등정신을 실천에 옮긴 서민대중의 사제라는 점을 특별히 중시하고 있다.
최 신부에 관한 연구논문은 우선 일반대중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언어로 그리스도교 교리와 사상을 뿌리내린 12년간의 행적을 학문적으로 정립, 체계화시키면서 고찰한 첫번째 논문이라는 점에서 보다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최 신부는 위험을 무릅쓴 포교활동으로 한국교회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별로 거론되지 못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행적을 재검토하고 그가 남긴 서간 및 천주가사 등에서 표출되고 있는 사상이나 의식세계를 재조명, 오늘의 한국교회사 안에서 더 나아가 한국 정신사안에서,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밀도있게 제시한 이 논문은 최 신부의 생애ㆍ사상의 깊이를 새로운 감각으로 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평가할 수 있다.
숨겨진 최 신부의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것은 역시 최 신부가 손수 저술한「천주가사」라고 말할 수 있다.
천주가사는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있는 신자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없었고 종교적인 행사도 사람들의 눈을피해 밤에만 행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하에서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교리지식을 전달키위한 필요에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성가라고 표현할 수 있다.
4ㆍ4조의 가사체인 천주가사는 한문을 모르는 일반신자들이나 어린이ㆍ부녀자들이 쉽게 부를수 있도록 만들어진 토착화된 교리서라고 김옥희 수녀는 지적하고 있다. 다시말해 천주가사는 한국인의 전통사상과 서민의식에 알맞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토착화한 형태의 가사로 그 시기에 대중적인 문학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다.
김옥희 수녀는 천주가사와 함께 최 신부의 사상ㆍ정신ㆍ생애를 엿볼수있는 사료로서 최 신부의 서간을 꼽고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 신부의 서간은 라띤말로 씌여진 총 19편으로 현재 빠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관되어 있다. 포교 시작전부터 활동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심경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최 신부의 서간들을 보면 어두운 국내정세속에서 아무런 정신적인 위안을 가질 수 없었던 민족에 대한 연민과 동포애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동포에 대한 연민과 동포애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하여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포교정신과 사명정신과 사명감으로 승화한 것이라고 보는 김옥희 수녀는 그의 사제적 역량의 스케일이 남달리 크고 깊었던 것도 바로 이같은 사상이 기조를 이루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큰 그릇으로 비유되는 최 신부의 행적은 온갖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일선에 나섰던 그가 과로로 인해 병으로 선종하자 그의 죽음을 접한 베르뇌 장 주교와 다블뤼 안 주교의 애도에서 잘 나타나있다. 장 주교는『왜 나는 열명의 최양업 신부를 갖지못하게 되었는가』라고 최 신부의 죽음을 한탄하였는가 하면 안 주교도『희귀한 그의 성덕과 변함없는 그의 열성ㆍ만사를 잘 완수했었던 그의 수완ㆍ민활성, 이러한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얼마만한 낭패이며 절망인고! 이는 실로 두고두고 통곡할 노릇이로다. 당장 무엇으로도 보충할 수 없는 손실이로다』라고 최 신부의 갑작스런 선종을 안타까와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김 수녀는 상기시키고있다.
아울러 김옥희 수녀는 최 신부가 남긴 서간의 내용 대부분이 정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가난한 자신의 고국ㆍ자신의 민족인 한국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포교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애도한 두 장상의 표현에서 최 신부가 지닌 부동의 사목자세를 읽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최 신부의 이같은 행적이 거의 사장되고있는 현실을 가슴아파해야 한다고 거듭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오로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일관한 최양업 신부의 생애는 순교로 점철된 그의 가계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김 수녀는 설명하고 있다.
순교복자 최경환(프란치스꼬)과 역시 순교자인 이성례(마리아)를 부모로 1821년 충청도 홍주지방 다레골(일명 다락골ㆍ현재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동)에서 태어난 최 신부의 가계를 살펴보면 1839년과 40년, 각각 순교의 대열에 나간 양친을 중심으로 최해성(요한) 최브리짓다, 최대종(요셉) 최봉한(프란치스꼬) 등 뛰어난 신심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천주교를 가풍과 전통으로삼고 이를 생활속에 실천 해온 가풍이 바로 최양업 신부의 헌신적인 목자적 삶과생애에 결정적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김옥희 수녀는 그의 논문서론에서 주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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