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어둠에 잠겨가던 침묵의 땅에서 한 마리의 양이라도 끝까지 돌보려다 순교한 이광재(디모테오) 신부. 그는『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씀을 전 생애를 통해 실천한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였다. 10월 9일로 순교 33주기를 맞는 故 이광재 신부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그때의 양떼들은 마지막 사목지 양양본당에 기념비를 세운다. 10월 1일 기념비 제막을 앞두고 이광재 신부의 생애와 순교 장면을 정리해 본다.
믿음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는 동료성직자와 수도자ㆍ신학생ㆍ평신도를 인도하여 안전하게 38선을 넘도록 주선한 용감성, 단 한명의 신자라도 남아 있는 한 떠나지 않겠다며 4백리 길을 찾아 나선 충실함으로 양양본당 신자들을 위시한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이광재 신부의 모습은 신앙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모습이었다.
1909년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 맹골에서 태어난 이 신부는 36년 2월 28일 사제로 서품됐다. 풍수원 보좌를 거쳐 39년 자신의 출신본당 양양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이 신부는 일제말기 가난한 신자들과 함께 궁핍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본당공동체를 이루었다.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난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탱크를 앞세우고 진군한 소련군은 성당을 빼앗고 더 혹독한 탄압을 자행했다.
인민군의 주둔으로 성당에 돌아온 이 신부는 사방으로 조여드는 인민군의 보이지 않는 탄압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양떼들을 돌보았다.
양양본당은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본당이었기 때문에 함흥교구와 덕원신학교에서 이남으로 탈출하려는 신부ㆍ신학생 및 수도자들의 중요 기착지가 되었다.
이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본당신자 김봉만(보니파시오) 씨를 안내인으로 하여 15회 이상 신부, 신학생 및 수도자들의 탈출을 도와줬다.
자신의 탈출을 권하는 신자가 있으면 언제나 꾸짖으며 단 한 명의 신자가 있어도 떠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를 보인 이 신부는 50년 6월 신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모승천대축일에 대비하여 성사를 주겠다며 공소순시에 나섰다. 6ㆍ25발발 직전인 당시 이미 신부ㆍ수녀는 물론 회장들까지 모두 잡혀간 사실을 알면서도『1년에 한 번은 성사를 줘야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꼭 가야한다』며 본당을 떠난 이 신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 신부의 최후는 함께 순교한 김봉식(바오로) 신부와 같은 방에서 포로생활을 한 한천명 목사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공소순시길에 인민군에게 체포된 이 신부는 김 신부와 함께 원산 포로수용소에 3개월간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진군으로 후퇴하던 공산군은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몰살시켰다.
10월 8일 콩비지라는 특별 저녁식사를 제공한 인민군은 그날 밤 11시 포로들을 4명씩 한데 묶어 끌고나갔다. 언덕 중턱의 지하 방공호로 향한 포로들은 습기에 찬 좁은 굴속으로 촛불을 손에 든 공산군의 감시를 받으며 들어갔다. 공산군의 호령으로 걸음을 멈춘 방공호 속에는 총을 든 간수와 촛불을 든 공산군이 나타났고 그들의 발밑에 방금 숨진 포로들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이 신부를 비롯한 포로들이 이 처참한 광경에 놀란 틈도 없이 시체위에 엎드려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뒤이어 총탄이 쏟아졌다. 이곳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 목사는 부상을 입고 살아난 평강고교 학생이며 신자인 권혁기 군의 증언으로 이 신부와 김 신부가 총탄에 맞아 즉사한 것을 확인했다.
언제나 성경을 읽고 신자들과 담소하기를 즐겨하던 이 신부는 감옥 안에서도 옆방에 있는 김 신부와 함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죽음을 무릅쓰고 양떼를 찾아간 목자 이광재 신부의 시신은 북진한 국군과 원산본당 신자들에 의해 원산천주교회 뒤편 묘지에 안치되었다.
이 신부의 도움을 입은 이들은 한결같이『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애통해하며 이 신부의 순교자적 죽음을 높이 기리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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