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가 되면 재학 중의 성적과는 달리 사목에 뛰어난 분들도 있다.
나와 같이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본당 출신으로 용산신학교에서 공부한 윤의병(바오로) 부제는 1920년 9월 18일 신부님이 되셨다.
나폴레옹처럼 작달막한 키에 과묵하고 깜박깜박 쉴 새 없이 눈을 깜박이는 윤 부제는 대미사때 부제복사를 할 때면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교장신부님이 마구 야단을 치셔서 내 어린 마음에도 언짢았다.
공부도 그럭저럭 이어서 신학교 재학 중 교수ㆍ교장신부님과 친구들에게 별로 좋은 말을 듣지 못했던 분의 하나인 윤 부제님은 사회에 나가서는 신자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그분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처럼 순종하는 것을 보니 꼭 프랑스 남방의 아르스촌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윤의병 신부님은 1889년 9월 27일 안성군 청룡에서 박해시절 교우촌에서 윤자호(시몬)와 김발바라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윤 신부님 집안은 대원군 10년 권좌의 박해 중에 박종헌(마르꼬) 신부, 황정수(요셉ㆍ대전 황민성 주교의 숙부) 신부ㆍ신인균(요셉) 신부, 그리고 필자의 집안과 함께 다섯 집안이 똘똘 뭉쳐 서울 관악산에서부터 경기도ㆍ충청도를 돌아 경상도까지 높고 낮은 산에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았다.
필자와는 이러한 각별한 사이여서 필자가 입학하던 해에 신부가 되셔서 내게도 더욱 뜻이 있었다. 윤 신부는 사제품을 받자마자 매괴의 신부로 이름 높은 속칭 장호원(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현 감곡)본당 주임 임까밀로 신부의 보좌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당시 충북에는 성당이 장호원과 옥천 두 곳 밖에 없었다.
청주읍에 성당을 개설할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다.
윤 신부는 1921년 충북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공소에 공소집을 사제관으로 개축하며 살림을 낸 뒤 본당신부면서도 교회규칙상 장호원 임 신부님의 보좌로 3ㆍ4년간 일했다.
고마리공소집은 강당이 너무 좁아 주일미사를 지내기가 곤란해 윤 신부는 부임하자 곧 새성전 건립을 추진, 신자들과 손에 손을 잡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새로 지은 성당과 사제관 자리가 공동묘지 터였다는 것이다. 필자의 삼촌(오영렬)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궂은 비가 오고 안개가 끼는 밤이면 사제관 앞마당이 갈라지면서 소복단장한 젊은 여자가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와 머리를 풀고 슬피 운다는 것이다.
새로 준공한 성당에서도 밤이면 밤마다 괴물들의 장난이 있었단다. 특히 제의방은 괴물들의 오락장이 된 듯 어느 겨울밤에는 피워놓은 난로를 뒤집어엎어 새 성당이 온통 타버릴뻔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평소 성모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윤 신부는 한 손에 묵주, 다른 한 손에 촛불을 들고 묵주신공을 큰 소리로 드렸단다. 그러면 난리를 부리던 괴물들이 안개가 걷혀가면서 슬픈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가 다시 밤이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묵주의 기도를 드리면서 성수를 뿌리면 괴물들이 사라지고 이튿날이면 다시 괴물이 나타나는 일이 매일 거듭되자 윤 신부는 교우들 모르게 계속되는 일을 매듭지으려고 1923년 당시 서울교구 부주교인 유 부주교를 청하여 사제관과 새 성당 구석구석에 성수를 뿌리고 축성해주시도록 했다.
그러자 그 날 밤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유령들의 망칙스러운 장난이 깨끗이 사라졌다.
한국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같은 윤 신부는 매년 피정 때 용산신학교에서 개최하는「동창회」에 참석하셔서 우리들에게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필자는 당시 철학과 연구시절에 다니고 있었다.
윤 신부는 12년간의 과로로 결핵에 걸려 1933년 휴양 차 행주본당으로 옮겼다가 1935년 구월산에서 가까운 황해도 은율본당에 부임하셔서 육영사업에 심혈을 기울이시는 한편 늘 좋아하시던 한시(漢詩)로 청풍명월을 노래하면서 은율지방의 묵객들과 어울리셨다.
6ㆍ25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야밤에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돼 1개월 후 해주로 이감된 뒤 61세를 일기로 선종하셨다.
윤 신부님은 지금 저 먼 나라 저승으로 옮겨 앉으시어 천국에서도 청풍명월의 시 한 귀절을 오늘도 노래하시리라.
윤 신부님은 그 사목생활을 가슴에 모시고 나의 사목활동의 앞길을 비춰주는 횃불같이 여기며 살았던 분이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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