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신학교 입학 후 처음 맞는 성모무염시태 철례때였다. 조선 천주교회의 대수호자이신 성모님 축일을 맞아 12월 8일 용산신학교 신학생 전원이 명동대성당에 갔다.
아마 영하 24도쯤 될까, 우리 반 박 안또니오는 훈양말에 고무신을 신고 그 혹독한 추위에 대성당 성가대 위에 다 같이 올라가 민 주교님의 그레고리안 대미사를 참례하게 됐다. 내 발가락도 얼어버리는 듯 동동 굴러도 나중에는 무감각해졌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대미사는 12시에 가서야 겨우 끝나고 신경은 온통 발가락에만 쏠려 대미사에 정성도 기구도 할 수가 없었다.
들리느니「언제 끝나나?」「아이고, 지루하기도 하지」여기 저기서 수군대는 소리뿐이다.
미사를 끝내고 나오니 얼음 창고에서 나온 기분이었다. 전차를 타고 오는데 이 안드레아 순성학사님이 우리 칸으로 오시면서 고드름이 된 우리들을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명동성당 건립에 따른 옛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셨다.
1887년 5월 30일 우리나라와 프랑스 간에 통상조약이 비준되자 1백30년간 숨도 한번 크게 못 쉬고 쥐구멍 속에 숨듯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학수고대하던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그 4년 전인 1883년 지금의 명동인 종현의 터를 윤정현의 아들 윤태경에게서 김까밀로 전교회장 명의로 매입했다. 1893년부터 산봉우리를 깎아내리며 성당 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1885년부터 1887년 사이에 조선에 2번째 신학교를 강원도(현재 충북 여주군) 부흥골에 세우고 유리위빌 달영 신부가 교장을 맡을 당시에 시골뜨기 신학생들이 서울구경 한답시고 임금님이 계시는 경복궁의 광화문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구경하다 발각돼 체포됨으로써 한불조약의 유효ㆍ무효까지 거론케 됐다.
(「울음에 젖었던 광화문」편에 이야기한 바 있다) 당시 외무대신인 조병식은 명동성당 터를 닦아놓은 주위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일꾼들을 총개머리ㆍ몽둥이로 구타하고 심지어는 죽인다고 명치에 총부리를 들이대곤 했다.
이 학사님은 발 시려운 우리들을 달래시느라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윤태경과 천주교 재단 사이에 성립된 토지매매문서를 들고 와서『역대 임금님들의 진영(얼굴을 그린 그림)을 모신 영희전이라 성당을 못 짓는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블랑 백 주교, 부주교 겸 본당신부이던 박 빅또르 신부와 건축현장감독이고 설계자인 요한 꼬스트(R.J.C.oste) 신부, 그리고 김요한 기호 총회장들은 천지가 아득해졌다.
땅문서에「永禧殿 后麓勿壞傷(영희전후록을 훼손ㆍ파괴하지 못한다)」라는 문구가 있더란다.
그때 백 주교님 이하 모든 성직자와 총회장 김기호 씨 모두모두 원죄 없으신 성모마리아께 서원을 했단다.
이 학사님은 당시의 상황을 『성모 어머님, 이 난리를 이겨내면 대성당을 완성케 됩니다. 이 성당을 「원죄 없으신 성모마리아」께 봉헌하고 대수호자로 모시고 어머님의 성덕을 기려 천주만대에 이 땅에 전승토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표시로 마귀를 몰아내는 성분도 제대와 성분도 동상을 해 바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설명해주셨다.
기도를 마친 뒤 부주교 박 빅또르 신부님이 문제의 문서를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첫 줄을 쓱 문지르자 끝의 몇 줄은 먹이 퍼지면서 글자가 뭉개졌단다.
그러자 조명식의 턱 밑에 문서를 들이대며 『이것은 위조한 문서입네다』하고 따지고 땅에 내던졌단다.
이 소리를 들으며 전차 안의 신학생들은 전차가 떠나가도록 박수를 쳤다.
양측이 모두 진퇴양난이 되자 총회장 김기호가 중간역할을 해서 지금의 구관 주교댁 식당(아래층)에 다 들어가 포도주를 나누어 가며 화해 무드를 익혀갔다.
풀이 빠진 조병식은 포도주까지 얻어 마시고는 『그 문서를 외무부로 보내시오』하고 물러갔단다.
일주일 후에「종현성당터는 천주교 소유로 인정한다」고 정정해서 보냄으로써 우리 성모님이 승리하셨다. 또 다시 박수갈채가 전차 속에서 터져 나왔다.
이 학사님은 희색이 만면해서 침을 삼켜가며 말을 이었다.
1898년 성모성월중인 5월 29일 종현대성당을 원죄 없으신 성모마리아께 봉헌하고 대제대 뒷벽에 프랑스에서 주문해온 성모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 성모상에 얽힌 일화가 또 있다. 양기섭 신부가 본당신부였던 1962년경 석고성모상을 안치했고 이문근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되자 구박받던 성모상이 79위 복자제대 앞에서 천지의 모후 성모마리아로 아기예수를 안고 계셨다. 이문근 신부가 선종하고 후임신부가 오자 성모상이 온데간데없어졌다.
지난 9월 13일 샬뜨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알아보니 명동성당 수녀원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찾아가보니 방문이 잠겨있어 열쇠가진 수녀님을 수소문해 열어보았다.
오호라! 이럴 수가… 우리 성모님상은 수녀원 2층 올라가는 구석에 소박맞은 듯 무료히 서계시질 않은가.
『성모님,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소서!』
1백년을 눈앞에 둔 이 성모상은 현 명동본당 주임신부인 김수창 신부가 잘 모셔줄 것을 약속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성하께서 조선독립교구를 설정하시고 첫 교구장으로 브리기엘 소 주교를 임명하신 후1841년에는「원죄 없으신 성모마리아」를 전 조선천주교회의 대수호자로 정해주셨다.
명동성당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 안드레아 학사님은 1923년 5월 20일 신부 품에 오르셨고 6ㆍ25동란때 황해도 정봉 주임으로 사목 중 공산당에게 납치되신 후 오늘까지 소식을 알 길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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